2009/06/23 16:43
잡동사니
앎을 통해서 획득하게 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절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절대선' 내지는 '참된 진리'이다. 이것의 소유를 주장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는 순식간에 거짓과 허위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져 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 상황에서 '지적 활동'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지식의 성스러움이 붕괴된 지점. 지식의 속됨. 지식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도구이자 은폐된 사적 이익의 선전물 내지는 허영적 상상력의 만족을 위한 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식인에 대한 당연한 혐오의 감정을 품게 만든다. 이러한 속내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언제나 찬란한 빛을 배경처럼 들고 다니려 한다. 지식의 속됨은 사실 그래서 지식인의 속됨이다. 앎의 내용 그 자체를 분리해서 그 순수성을 옹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앎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가야 하는 힘의 필요가 아닐까? 대항해야 한다. 대항해야 하는 하나의 힘을 가져야 한다. 강자 앞에 굴복하며 자신의 존엄성을 비굴 그것과 동일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 혹은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극악의 해악을 끼치는 대상에 견줄 때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 손에 인간다움을 얻기 위한 싸움의 '도구'가 필요하다. 그 싸움은 패러독스로서 '평화를 위한 전쟁'일 수도 있다. 아니면 거기에는 열려진 가능성, 또 하나의 악을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절대선'의 몽매가 가져다 주는 해악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앎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가야 하는 힘의 필요가 아닐까? 대항해야 한다. 대항해야 하는 하나의 힘을 가져야 한다. 강자 앞에 굴복하며 자신의 존엄성을 비굴 그것과 동일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 혹은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극악의 해악을 끼치는 대상에 견줄 때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 손에 인간다움을 얻기 위한 싸움의 '도구'가 필요하다. 그 싸움은 패러독스로서 '평화를 위한 전쟁'일 수도 있다. 아니면 거기에는 열려진 가능성, 또 하나의 악을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절대선'의 몽매가 가져다 주는 해악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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