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정, 그 기억, 상상력의 대화 (과, 2004/11/22)

2007. 2. 21. 15:10etc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긍정해야 하는 것이 자기라는 존재이다. 그것이 생명이기도 한 것이다. 소위 생존 의지라 불리는 생명의 작용. 개체의 보존, 그것이 유전자 수준에서 기능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양태로 드러나는 대부분의 생존의지는 개체를 단위로 가진다. 개인주의라는 개체 중심의 의식에 따른 하나의 세계상이기도 하지만. 개체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정신의 근간으로 자리잡은 이 개체 중심의 사고방식은 재화로의 교환가치를 통해서 '인간 개개인'을 평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생존을 모색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자기 존재를 재화가치로 평가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개인을 평가하는 많은 수치들은 그 객관적인 지표로 작용하고 있다. 다분히 그 투자 자본의 양도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자리에 돈 놓고 돈 먹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존에 대한 의지를 기본적인 의지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소수에 의한 자본 독점은 사회 불안 요인이 된다. 불리한 자본력은 곧 불리한 생존 능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게 다수가 된다면 사회 불온층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니.. 이는 상당히 뻔한 소리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다.

무의미한 자기 가치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죽어가는 인간들이 생기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자기 부정, 또는 자살이란 것은 이러한 지금 우리의 상상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개체 보존의 생존 의지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과잉이고 과민일까? 생존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개체에게 부과되어 있는 이와 같은 자기 부정의 상황(자신의 생존이 불리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주는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생존의지를 약화시키게 된다. 구조적인 해결책이 없을 때는), 그것은 또 다른 생존의지의 표출이 될 수 있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삶을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삶이라는 진동에 놓여진 추의 중심잡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설적인 삶의 현장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러한 역설은 작위적이고 상당히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은 수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고 상상이다. 단지 적응이고 채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을 생존의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라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다른 개념을 접목시킴으로써 역설적인 삶의 현장이 지닌 창조적 힘을 평가하고자 한다. 생존의지의 약화를 통해서 증가하는 것, 역설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역-위치에너지의 힘, 행복의 가능성이다.

개체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시스템은 사회에서 부여 받게 된다. 자기에 대한 기억의 항목들, 그 기억을 구성케 만드는 기준들은 교육 받게 되는 것들이다. 인간의 상상적 산물이기 때문에 생존의지의 욕망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욕망의 투사에 의해 구성되는 척도, 당연히 한계를 가진다. 그 척도가 단순할수록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권력의 통제를 자본에 맡겨버린 사회는, 사회적 의미론의 다양성과는 달리 가치 척도는 상당히 단순해졌다. 교환가치 바로 그것이다. 그 척도 안에서 다양한 의미론들은 그 색상을 잃어버린다. 무채색의 배열이다. (+), (-)의 부호들만 남는다.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숫자들과. 만에 하나 그 척도가 사라졌을 때, 그 현실로 규정되는 단순한 세계에 질려 버렸을 때, 큰 위치에너지를 가진 자기 긍정의 자유낙하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허무일 뿐이다.

개체가 가지고 있는 삶이라는 진동이 만들어내는 파동의 파국은 실험되는, 그 극한에 항상 위협당하는 이들에게 저항력이 큰 법이다. 낮아진 생존의지의 피드백은 행복의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척도의 단순성으로 인해서 높아진 행복의 가능성은 자기 존재의 긍정을 강화시킨다. 자기 부정의 무한에서 높아진 자기 긍정은 어쩌면 모든 것에 대한 긍정으로 환원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부정의 기억은 허무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허무의 반동과 행복 가능성의 증가는, 사회적 척도가 아닌 자기 기준을 만들게 한다. 생존의지의 평형작용은 자기 긍정의 메커니즘을 고안케 만든다. 그 메커니즘은 가치를 생성시킨다. 존재의 긍정을 위해서는 가치 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미가 발생해야 한다. 몸짓이 아닌 이름이 되어야 한다. 기억되어야 한다. 한신의 배수진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자기 부정은 생존의 배수진이다. 그 괴력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기억되고 이름이 되기 위한 의미의 창조인 것이다. Homo Symbolicus는 왜 사냐는 물음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