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과 조연 또는 엑스트라에 대해서 (2004/11/27)

2007. 2. 21. 18:31etc/삶에 관한 단상

영화를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영화의 이야기, 대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주인공들의 삶이 이야기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로맨스를 다룬 영화에 있어서 이것은 거의 넘어설 수 없는 원칙이다. <러브 액츄얼리>가 이에서 벗어나는 예로 언급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 영화는 주인공들이 많은 영화였다.


관객의 입장에서 귀를 기울이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주로 감정 이입을 통해 관객 자신이 투영되는 이야기가 된다. 쉽게 말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는 거다.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나 성공신화에 대한 것이든 로맨스에 대한 것이든 그게 통속적인 구조를 지닌다고 했을 때, 역전의 또는 불굴의 의지의 승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언제나 관객은 그 승리를 사유화한다. 이입을 통해 뇌 속에서 구현되는 경험이라는 것인데, 이게 현실적 경험 외의 것에 대한 것이라면 당연히 현실 삶에 있어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쉽게 예상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뇌에서 시뮬레이션이 이루어진 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자기 ‘삶’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감독으로 주연 배우로 활약을 하게 된다.


시꺼먼 상상의 공간을 벗어나 햇살을 만나거나 밤거리의 찬 공기를 맞으면서, 현실로 되돌아온 관객은 그렇게 다시 현실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영화는 완벽한 시나리오 작가도 완벽한 감독도 완벽한 주연 배우도 허락하지 않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를 훈련하고 상상한다. 그 완벽한 감흥의 미학에 홀려 현실의 제한 사항을 날려 버린다. 결국 순진함의 유혹에 노출되어 어쩔 줄 몰라 자신의 유치에 귀의하게 된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그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적 상상력을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누구나가 그 ‘허구성’을 쉽게 지적해 낸다. 그리고 한결같이 ‘유치’를 난도질 한다. 이는 건전한 발상이고, 필요한 우리의 비판적 지성의 생존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혹에 약한 인간에게 그러한 ‘말’은 수사적 또는 이성주의의 분위기에 호응하는 것 이상이 아닐 수 있다는 데에서 구멍 또는 미끄러짐을 드러낸다. 인간의 합리성의 구조적 허약성이라 하겠다. 행동함에 있어 본능과 욕망의 충동질에 예수라고 달랐겠는가!


아하, 영화관의 교리를 현실에서라고 저버리겠는가! 자, 여러분이 main player입니다! 현실에서 1인칭 시점에서 자기의 삶을 영화적 상상력에 맡긴다고 한들 그 누가 무어라 비난할 것인가? 오직 자신의 책임 하에서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이라고 규정되는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자유’가 실현되는 신기루와 같은 ‘유토피아’가 아닌가! ‘나는 주인공이다!’ 영화의 필름은 돌아가고 큐 싸인과 함께 강한 생의 의지의 맥박은 기름 번드르르한 머리를 빗으로 넘기며 바람에 코트를 펄럭이며 썬그라스를 벗어 재끼는 ‘나’를 만들어 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관객들이여 나에게로 감정이입하라.’ 자기 삶의 극장에 참여한 모든 이들, 그들은 모두 ‘나의 삶’이라는 영화의 관객으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적 상상력의 세계는 그렇게 재창조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그들을 영화 밖에서 ‘스타’라 부른다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지구에 있을 것 없이 저 멀리 걸려 버려야 하는 ‘별’로서 바라봐야 하고 그렇게 방향을 정해주는 푯말로서 ‘저 멀리’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스타’의 자리는 ‘나’가 차지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저 멀리’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물리적인 시간과 다른 경험적 시간의 세계에서 영화적 드라마틱한 흥분은 좀처럼 연출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영화적 상상력의 세계는 그렇게 장시간 현실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그 지배력을 의심할 수는 없다. 누구나 밀어 놓는 그 ‘주인공’의 자리가 경험적 시간 안에서 빗겨 나가기 시작하는 지루함의 통로를 거치면서 밀려오는 배신감. 우리의 이성이 깨여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독설을 퍼 부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에서 조연 또는 엑스트라로의 추락은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상상에 의해서 철저히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이 화가 난 ‘나’는 ‘상상’을 쓰레기통에 꾸겨서 처박아 버린다. 아, 현대인의 시지푸스적 추락이라니! 슬금슬금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척 하다가 꾸겨진 ‘상상’을 다시 펴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놓아두고 마는 인간이여!


속절없는 희망의 그림자는 그렇게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배신의 과정 속에서 그려지는 초라한 파노라마. 패러다임적 이야기의 현실화는 종종 그러한 희망에 기대어 행동을 지배하곤 하는데, 배반의 굴레에 닥쳐 기억되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는 귀마개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와우! 인간은 철저한 완전범죄를 꿈꾼다. 자기기만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정신의 구현 그 자체다. ‘상상’은 파편화되고 기묘한 ‘현실’의 옷을 입는다. 행위의 선택은 현실적 고려 안에 담기며, 안도의 한 숨과 함께 마무리 된다. 너무나도 이성적인 그대여, 당신은 정녕 현대인입니다.


정녕 이성이 아닌 ‘이성’의 옷을 입고, 현실이 아닌 ‘현실’의 옷을 입어, 경험이 아닌 ‘경험’의 향수를 뿌리고, 올라 선 곳이 정녕 ‘상상된’ 무대라는 데에서 자기기만의 완전범죄의 마각은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번번이 추락하는 것의 날개를 울부짖으며 다시 골자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계몽의 등불조차도 우습게 허구적 이야기라며 돌려 세웠으면서도 그 가면을 버릴 수 없는 현대인에게 불행하게도 다시 날아야만 하는 숙명의 바위 밀어올리기가 요구된다.


조연의 이야기, 엑스트라의 이야기에 대한 간과는 빈번한 그리고 전형적인 상상력의 길이다. 그러나 현실의 적나라함 앞에서 배반의 쓴잔을 과감히 거부하고 시지푸스의 몸짓에 대한 환멸 찬 거부에서 하찮은 자신, 외소해지는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그 길은 더욱더 잔인하기에 그만큼 실감 있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수용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핫, 이만큼 ‘나’에게 잔인하다면야 여기가 바로 현실이 아니겠는가 하고 야심에 찬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기만의 숙명을 간과한 자신을 곧 발견하게 될 테니, 단지 엑스트라를 조명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뿐이다.


소박한 몸뚱이의 진리를 수용하여, 현실 그 자체의 수용으로 화해를 선언하면 다일까?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야 진작 유토피아는 지상에서 실현되었을 것이다. 진동의 자기 파동을 그려나갈 수밖에.. 윤리적인 메시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최대한 정직하게 살기, 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