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학벌 사회 그리고 대학원 문제_발췌

2007. 5. 6. 02:31글읽기

pp. 70-76

학벌 사회 그리고 대학원 문제

학문 후속세대들이 학벌이라는 그물의 동선에서 덜미를 잡히고 있는 현상은 이미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의 누적은 결국 요즘 들어 학벌의 피폐성을 공론화하게 만들었다. 학벌 문제는 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고질병과 같아서 일반 시민들의 학벌 철폐 요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학벌 철폐의 논리를 환영하고 학벌 없는 평등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걸어보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학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계층이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둘째, 학벌 사회를 비난하던 많은 사람들이 학벌이라는 꿈을 좇아 그들의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가면서 학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벌의 아성에 편승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구조, 교수와 대학원생의 무의식적 권력 관계를 보자.] 이미 오래 전부터 도제를 빙자한 교수와 원생 간의 불공정 관계는 세월의 변화에 따라 여전한 정도가 아니라, 더 심각해져만 가고 있다. 두뇌한국21 프로젝트 이후 이공계열의 석박사 과정은 돈에 휘청거리고 있으며, 교수직을 기다리고 있는 인문학 실업자 박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오히려 원생에 대한 교수의 권력은 커져가기만 한다. 그만큼 원생들의 자기 갈등도 증폭되어 가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우리의 대학원 구조가 학벌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첫째, 논문 지도와 관련해 교수의 학문 외적 기득권을 놓으면 된다. 둘째, 교수의 권력 구조에 편승하려는 원생 스스로 그런 생각을 포기하면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제안을 해결 방안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은 할 수 있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을 무시한 원론적인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실은 어떠한가? 원생들과 실업자 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득권층의 대학 교수들은 신임 교수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혀서는 권력 후속세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같은 학과 안에서 교수들과 원생들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교수들에 대한 원생들의 집단적인 항명 사태가 점점 늘고 있다. 조교를 교수 개인의 하인 부리듯 하는 경우가 아직도 여전하다. 벤처기업을 한다고 하면서 원생들에게 기약 없는 회사 업무만을 시키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다. 물론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자들의 실험 연구 논문이나 번역서에 지도 교수 이름을 끼워 넣는 일은 이미 오래된 일이기도 하다.

원생들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논문 주제로 선택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늘어만 가고 있다. 연구 보조금이나 조교 장학금에 매달려 자신의 논문 주제를 아주 쉽게 갈아치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학부)교육중심대학과 (대학원)연구중심대학을 구분해서 지원한다는 교육부의 방침 이후, 연구중심대학의 원생들 세미나 토론 수준은 오히려 더 낮아졌다. 왜냐하면 학벌의 파장이 대학원에까지 미치어 학문이 아니라 학벌을 중요시하는 대학원생들이 몇몇 학벌 있는 대학의 대학원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원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연구중심대학이 학벌중심대학으로 바뀌어 또 다른 방식으로 학벌의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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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교수와 원생의 문제를 마치 대립적으로 비교하면서 양쪽 모두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겉보기 양비론이 갖는 논리적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학원 논문 통과 과정에 이르기까지 교수는 원생에 대해 대립적 위치가 아니라 분명한 우월적 지위에 서 있다. 그래서 교수가 우월적 지위의 칼을 비합리적으로 휘두를 경우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게 된다.

사실 이 문제는 대학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권력 구조의 모순이 대학원 사회에 반영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경우 우리 대학원 구조가 당장 풀어야 할 문제점들이 희석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비록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더라도 좀더 작은 범위 안에서 실용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먼저 학과 단위의 문제이기보다는 대학 자체의 재정난으로 인해 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원의 입학생 수를 대폭적으로 늘려놨고, IMF 이후 학문보다는 학문 외적인 상황에 의해 대학원에 입학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이 전문화된 학문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특수 대학원의 경우 인간관계 자격증이나 승진 자격증 양성소로 전락된 사실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대학원 세미나 수업이 있기는 하지만 학부 수업보다도 못한 강의 준비와 미비한 수업 여건이 다반사다. 따라서 교수 중심의 실험실 여건이나 장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생들이 필요로 하는 여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학의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인문사회 계열의 경우 턱없이 부족한 커리큘럼을 보완하기 위해 원생이 이동하는 수업과 교수가 이동하는 수업 등의 대학 간 공동 커리큘럼 운영을 하루빨리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정난이라는 핑계도 해결할 수 있다. 물론 현재도 몇몇 대학에서는 대학 간 학점 교류를 시행하고 있지만, 각각의 대학원 내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한 대학의 원생이 다른 대학의 대학원 수업을 수강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최근 조금씩 표면화되고 있는 원생들과 교수들 사이의 내적 갈등은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수들도 대학원생 과정을 모두 거쳤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면 합리적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문제를 교수와 원생의 개인적 관계로만 조명할 경우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제도적인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학술진흥재단이나 과학재단 등의 공사립 연구재단에서 비전임 소장학자에게 지원하는 방식은 3년 이상 장기적이어야 한다. 혹은 시간 강사로 출강하는 대학에 간접 지원함으로써 방학 중에도 강사료가 지급되는 방식도 가능하다. 여러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자유연구학자’의 위상을 확보하는 일이다.

인문학의 경우 많은 석박사들이 그들의 대학원 공부와 관계없이 기약 없는 시간 강사로, 학원 강사로, 그리고 소위 말하는 등처가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대학원 과정에서는 책임질 수 없는 갈등들이 재현되고 있다. 학문적 도제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저당잡히고 있는 후학자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면 곧 우리 학문의 위기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미래도 암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의 향유는 일종의 문화적 바이러스로서 우리 후대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전염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