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사는 인간(2004/12/10)

2007. 2. 21. 18:57etc/삶에 관한 단상

현재의 순간은 어떻게 서술될 수 있을까? 이미 반추되어 과거로 존재한 '순간으로서의 현재'를 기억할 뿐인데, 실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그 갭은 완전히 매꾸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 찰라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수사적 차원의 '작위적 갭'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식되지 못한 그래서 그대로 존재하는 그것으로서의 현재의 순간은 '날 것'이며 '일상'이며 '의미 없는 것'이다.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날 것으로서의 현재는 그저 '물자체'일 따름이다.

현재를 인식하는 구조는 어떠한가? 인식의 작업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게 되면서 인간의 현재적 행위는 당연히 기억에 의해서 불러일으켜지는 '사태의 패턴'으로 인식되며, 그것이 하나의 패턴이고 패러다임인 것이기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이야기에서 행위자의 행위는 구체적 선택지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을 불러 일으키는 주체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성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됨'의 자질은 드러나는 행동에서 확인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패턴을 인식하는 방식, 그 인식된 패턴 내에서 행위자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실험을 해 보자면, 완벽하게 유전자가 같은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과의 관계라는 것이 이러한 인식구조에 기반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현재 경험되는 조건들은 생(生) 이후 경험된 '인상적인 사태', 즉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신화'라는 것이 이런 기억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집단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기억'이 확산 지배적 '스토리'로 정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권력을 장악한 '이야기'이자 '기억'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소'라고 일컬은 것에 주목해보자. 이 이야기로서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상당히 파편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차원에서 회상되는 패러다임의 이러한 파편들은 현재의 이야기를 인식시키기 위해서 조합된다. 귀납과 연역의 논리적 전개와 유추와 비유를 통한 사유의 비약을 통해서 과거의 파편들은 현재를 브뤼콜라주로 만들어낸다.

과거의 패러다임의 단편들은 어떤 '원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아주 멀리 갈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머니의 몸과 자식, 그리고 그 주위에서 부딪힌 사태들 내에서 형성될 터이니 말이다. 거기에 여러 문명의 기계들(TV, 라디오 등등)이 이야기 파편을 집어 넣게 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인식 주체의 사고실험에 의해서 도달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회상' 작업을 통해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 순간의 인식, 그것이 과거 패턴의 브뤼콜라주일 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체를 통해서 스토리를 재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정확성을 감당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 개체에 대한 실험이 필요한 부분인데... -_-;

이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인간에 대한 브뤼콜라주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설명인 것인데, 결국 구라일 공산이 크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사태는 완결적인 스토리를 가진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규칙적인 자극과 함께 '잠'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간극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인식 단위의 분절적 계기들은 다양하다. 시간적인 구분 뿐 아니라 장소에서의 구분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이야기들, 주어진 조건은 클리어 해 나가는 차원에서 현재의 순간이 주어질 때라면 이야기는 전형적인 패턴에서 완결될 수 있다. 또는 그러한 패턴들은 전형적인 패턴으로 브뤼콜라주로 만들어 질 것이다. 자의의 선택이 작용하는 열린 사태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완결될 수 있을까? 선택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모색되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야 다음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현재를 벗어나려는 원심력에 몸을 싣게 될 수밖에..

현재의 개체의 선택의 구조는 위에서 약간 언급된 적용된 패러다임의 구체적 행위자의 '예정된' 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떤 패러다임이 선택되는가? 무엇이 개인에게 있어서 현재를 설명하는 주요한 패러다임으로, 패러다임이 여러가지가 존재할 때 특별히 '그것'을 불러오게 하는가? 사뭇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이 부분의 설명은 참으로 난감하게 생각된다. 이미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패러다임은 계속 그 단편적 특성을 지니면서도 변형되어 왔고, 현실의 조건들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계속 새롭게 구조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을 시도하는 인간에게 현재는 '모델의 패러다임'을 당기게 한다고 단편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모델'은 지향적 모델이긴 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모델'이라는 표현에는 '의지적 지향'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익숙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소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데, 현재의 사태는 '의미있는 실재'로서 과거의 기억된 이야기에 기대고 있지만 현재의 소망의 틀을 지나서 브뤼콜라주로 만들어진다. 다차원의 세계에 사는 인간이다. 현재를 사는 인간을 이해하기란 참으로 지난한 것일 수밖에, 이다지도 복잡한 차원에서 패턴의 파편의 조합과 상황에 따라서 선택되는 지향에 따라 이야기가 완결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부는 이루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