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윤리의 증발 - 무엇을 배우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2008. 2. 24. 12:50etc/삶에 관한 단상

#1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서 "뉴스후 보셨나요? 이제 서민은 병원도 못가겠네요."라는 글을 읽었다. 그리고 "건강보험공단 직원이 생각하는 건강보험 민영화"라는 글도, 그리고 그 직원이 링크 해 놓은 '예비'의사의 글, "의료보험당연지정제폐지논란에 관하여"도 읽어 보았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는 아직 보지 않았다.

#2
'고소영'과 '강부자'가 어느 날 각광을 받고 있어 깜짝 놀랐다. 두 배우에 대한 안 좋은 소문에 빠져 있는 대중의 한 명인지라, 이미지가 별로 좋지는 않았는데(당사자들은 꿋꿋하게 이런 한 대중의 이해를 무시해 줬으면 좋겠다. 개인으로 보면 참 미안한 일이니까 -_-;), 뚜껑을 열어 보니,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과 '강남 땅 부자'를 축약한 표현, 즉 신정부의 주요 인물을 두고 하는 하마평이다. 참여정부의 '코드 정치'의 연장과 그 보다 더 가슴 아프게 하는 '윤리의 증발'이다.

#3
'곰탕 특검'은 '이명박 특검'의 출범시에 보여 주었던 이미지에 비추면 너무 큰 추락이다. 실체적 진실을 보여 줄 듯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여러 의혹들을 그냥 묻어 버렸다. 그 놈의 곰탕 속으로. 2007년의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해당 팀의 특검보들에게서 흘러 나온 진술들은 애초 이 '곰탕 특검'의 한계를 이해했던 것이고,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4
'뉴딜 정책'을 기억하라. 한반도 대운하는 새로운 내일, 번영의 아침을 위한 우리의 진지한 준비이자 노력이다. '건설족'들의 물밑 움직임, 산발적인 반대의 목소리는 산일되면서, 중장비의 육중한 움직임이 시작된 듯 하다. '콤퓨타'를 장착했다고 우기는 '불도저'의 굉음. 이미 건설 거대 자본과 신권력자들 사이에 '합의'가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환경?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고.

#5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표방했던 민주 노동당은 쪼개졌다. 거대 노동 단체가 주축이 된 민노당이 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끌어 안기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친북 이미지'가 도마 위에 올랐고, 사람들은 자주파와 평등파로 완전히 갈라졌다. 정치 현실보다 자신의 삶이 급한 서민들의 눈에 또 하나의 '혐오'스러운 현실이 드러났을 뿐이다. 양비론. 자주파도 평등파도 싫다. 아니 서민 위한다고 '꼴갑' 떠는 인간들이 싫다. 노동자 위한다고 '깝죽'대는 인간들이 싫다. 그런 현실이 아닐지.

#6
부자를 너무 혐오한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아직도 후진국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건강보험료가 비싸다(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었음. 수입이 별로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 거기에 공과금 통신비, 사보험비 등등이 더 들어가니). 국민연금 같은 건 없애야 한다. 교육'시장'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의료'시장'도 마찬가지다. 세계로 문호를 열어 1세기 전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7
부모님이 장사 하느라 바쁜 철수는 게임과 TV보기를 좋아한다. 학교 공부는 별 흥미가 없고, 아이들과 어울려서 싸움 못하는 녀석들을 패고 다니는 것이 신나고, 그들과 욕과 싸움을 하며 하루 하루 살아간다. 수업시간에 떠들고 장난을 해도 선생님과 친한 어머니 덕에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는다.

#8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불러 학교 청소를 시키고, 급식 도우미를 시킨다. 나오지 않는 학부모들은 '싸가지' 개밥말아 드신 분들. '욕' 처드셈의 현장이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다. 선생님은 부모가 잘 나오지 않는 아이를 구박한다. 가끔 선물도 보내 주시는 철수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직 한 번도 자신을 찾아 오지 않은 영호 어머니를 떠올리며 같이 떠든 영호를 복도로 쫓아버렸다.

그렇게 무수한 아우성들이 넘치고 있다. 종종 '나라'가 들먹거려지고 국가의 미래를 국민 하나 하나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 된다. 그 미래는 '강성 자주 독립국'일까? 아니면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책임감 있는 국가일까? 물론 이 두 가지가 섞여서 결국 하나의 주장, '강성 독립 국가' 건설이, 그것을 위한 기업이 잘 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된다. 아직도 '국민'은 배가 고프니까.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더욱 강조되는 것은 '나의 이익', '우리의 이익'이다. '우리' 조차도 너무나 조각조각 나 있고.

우리는 부끄러움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등 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럽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익을 빼앗기는 것은 부끄럽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버려 두고 있으면 부끄럽다. 남들도 다 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쪽~팔리는 짓이다. 가난하면 부끄럽다. 멍청하게 노력만 하고 실속을 못차라면 부끄럽다. 싸워 짓밟을 수 없으면 부끄럽다. 꿈을 향해 살며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부끄럽다. 알량한 정의를 논하면서 지지리 궁상 떨며 사는 건 부끄럽다.

이 모든 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 된 것 같다.

20세기, '한국인'이 만들어지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받아 온 고통, 해야만 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하면 '국가주의'적이면서도 공동체 정신이 부재하고, 근대 문물과 합리적 정신을 추구하는 듯 하면서도 개인-동아리 이기주의 속에서 온 갖 부조리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배움을 중시하면서도 '올바름'에 대한 고민이 일천한 바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의 한 세기 동안에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이 철저하게 왜곡되는 모습과 정의로움이 선사하는 비명횡사를 목격했으며, 시류에 영합하여 얻는 살아가는 힘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 왔다.(오늘의 예: 이명박과 유인촌, 유인촌 부자되기와 장관되기)

우리의 부끄러움은 변했다. 올바르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게 되었다.
희망을 어디에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누구 하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꿈의 문제.
우리의 배움의 문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의 문제일 듯 하다.
공동선에 대한 고민, 올바름을 기준으로, 그렇게 함께 고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는다면, 이런 아우성들 속에서 내리는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 되겠는가?

또 다른 부조리에 대한 면죄부가 아닐까.
그 부조리의 칼날이 자기에게는 향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