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삶의 목적-하나의 베버 읽기, <직업으로서의 학문> 그리고 잡담, 자살론, 세렌디피티

2017. 6. 30. 03:01글읽기

세렌디피티의 한 장면을 포스팅하려다가 예전에 쓴 글을 발견했다. 지금도 글을 잘 못쓰지만 정말 잘 못쓰던 때라서 잘 읽히지 않는 글이지만 다시 포스팅을 해 본다. 공부를 업으로 해서 살기에 의심을 품었을 때, 즉 아래의 글을 썼을 때(2010년 1월)는 박사과정 한 학기를 보내고 난 이후였다. 지금은 학위논문을 마치고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해 나가고 있다. 이때의 의구심이 지금이라고 말끔히 풀린 것은 아니다. 호구지책조차 어려운 현실에 계속 좌절하게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정과 희망을 꿈꾼다. 게다가 지금은 어떤 '소명의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이 글에서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밝힌 게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하나도 수습하지 못했다. 다시 수습하지 못할 약속을 하진 말아야 할텐데, 그 문제들이 제법 흥미롭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언제 만들어질지는 모르겠다. '뭘 써 봐야지' 하는 짓을 이 글 외에도 여러 글에서 했는데, 정말 부끄러울 뿐이다. 아내와 한 하루 A4 1매 글쓰기를 시도한다면 수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알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어쨌든 아래 글도 이야기하다가 옆길로 새는 게 많은데, 다시 글을 덧붙이는 이 짧은 단락에서도 이야기가 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글 약속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해도 조만간 또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읽는 이도 많지 않으니 결국 김칫국이겠지만.



----2010년 1월 21일의 글


공부와 삶의 목적에 대해서 별로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근래에는. 예전에는 한 없이 그게 문제였는데. 참 오랫동안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아니 그런 고민의 흔적은 있었다. 그게 얼마나 내 삶과 관련되었느냐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공부가 업이 될 수 있는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 어쨌든 무언가 내면의 맥동을 쫓으려고 한 것은 같지만.


그러나 공부라는 것이 어떤 목적의식을 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의 정당성 문제를 묻게 마련이다. 거기에서 ‘삶의 수단의 문제이냐, 아니면 이상의 문제이냐’라는 상투적인 문젯거리를 쉬이 만지작거리게도 된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그 목표의 가치는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과연 '공부라는 업'의 정당성을 보장해 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허위의식이 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존재의 부조리를 느끼면서 공부하는 자의 포기할 수 없는 자기 검열의 기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차적인 내면의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상투적인 인용에 앞서 잡담을 하자면,


제법 멋있는 표현들은 이미 많이 인용되었다. 이미 닳고 닳은 베버의 그 ‘빛바랜’ 것만 같은 경구들을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낯 두꺼운 짓일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에게 그 번역을 제시해주는 역자마저도 ‘역자 서문’을 통해서 이를 선점해 버렸다. 다만 비뚤어진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바가 논지 외의 말에 꼬리를 물게 하는데, ‘막스 베버 사상 전집I’이라는 책이 있다.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 종교, 정치>>(전성우 역)라는 제목으로 나남출판에서 2002년에 출판되었다. 이후에 곧 절판되었고,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책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2006년에 나남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경악스럽게도 ‘분책’을 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하나의 작은 단행본으로 나왔다. 살림이나 책세상의 ‘작은 책’ 사이즈로 나왔다. 가격은 전혀 그 사이즈가 아님에도. 물론 큰 차이는 아니지만. 그리고 이미 이 글만 따로 해서 나온 책들이 많이 있었지만, 원래 묶였던 것을 다시 내면서 분책을 하니 뭔가 장사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건 아니잖아! -_-; 그래도 나름 팔릴 만한 것만 분책한 것 같다.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베버 종교사회학선집>이 그것. 잡담이 길었다.


앞에서 존재의 부조리 같은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무의미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 기반은 분명히 “세계의 탈주술화”와 관련이 되어 있다. 신적인 존재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보증되는 ‘진리체계’의 존재를 믿을 수는 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알다’는 의미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앎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과 앎이 혼동되는 지점에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앎은 아니다.


“세계의 탈주술화”를 이야기하면서 그 지평 위에서 ‘학문 하는 것’의 의미를 논한 것이 그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초점으로 돌아가 보면, 베버는 이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서 ‘학자의 요건’(외적, 내적)을 따지고, 이어서 주지주의화, 합리화의 과정 안에서, 즉 “탈주술화 된 세계”에서 학문 행위의 가치 혹은 의미는 무엇이냐는 문제로 나아간다. 이 징검다리를 톨스토이의 이야기로 놓고 있다. 죽음의 의미 문제. 문화인에게는, 그 문화인이 ‘진보’를 향해 걸어 나간다고 할 때, 하등의 의미도 없다는 진술.


대비적으로 플라톤 <<국가론>> 7권 초입의 ‘동굴의 비유’를 지적하고 있다. 계몽의 비유다. ‘참된 세계’를 알 때, ‘올바른 행동’에 이를 수 있다는 발상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길에 학문이 위치하는가? 베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도발적인 선언이 여기에서 도드라지게 인용되고 있다. 이미 그 참신성은 메말라 버린듯도 하지만 다시 되새겨 보면,


학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학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우리는 윤리적-당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윤리적-당위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어떤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55*).


*다음 책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M.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전성우 역, 나남출판, 2006.


이 무의미의 문제는 참으로 참신하다. 이미 빛이 바랠 대로 바랬을 이 말을 참신하다고 하는 것은 무모한 평가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여전히 이 말의 ‘환기력’이 결코 줄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사실’을 근거로 해서 ‘현실을 결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선언의 환기력은 결코 감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지속되는 그만큼 이 선언의 생명력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베버는 이 ‘의미 없음’에 동의하면서, 문제의 초점에 다가선다. 학문연구의 ‘전제’를 확인하고, 특히 연구 결과가 ‘알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보는 전제가 일종의 선택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선택’은 중요한 키워드다. “탈주술화 된 세계”에서 ‘선택’은 ‘실천’의 바로 전 단계를 말한다. 그리고 학문은 그러한 ‘선택’의 결실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러한 선택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학문의 한계, 실천적 의미론의 부재를 말하는 부분이며, 실천적 의미론의 선언은 예언자와 선동가의 일로 말하고 있다. “탈주술화 된 세계”에서 그들의 직업은 ‘종교인’과 ‘정치인’이다. 이 두 부류의 ‘어떤 동질성’을 베버는 명시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건 지극히 필자 개인의 관심사이지만, 다른 지면을 통해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다시, 알 가치를 학문 자체가 증명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 왠지 이런 말은 괴델을 상상하게 만든다. 비교적 오해에 근거한 이해겠지만, 어떤 체계가 그 체계 내의 방법으로 해당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 증명할 수 없는 체계 내의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일종의 ‘플라톤주의’와 맞닿아 있다고 하는 설명을 본 기억이 있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의 존재는 왠지 동굴의 비유와 딱 들어맞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런 개인적 관심사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베버가 나아간 것은 아니다. 이 ‘증명 안 됨’이 발생시키는 어처구니없는 문제 상황을 보여 준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존엄사’ 문제다.


의학의 일반적인 전제는 생명 보존과 고통 경감이다. 그런데 이런 환자를 생각해 보자. 불치병에 걸린 환자,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환자, 그러한 환자를 둔 가족이 그 환자의 향후 치료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는 상황이다. 이때 의학의 전제와 형법의 전제는 의사로 하여금 그러한 생명을 포기할 수 없게 강제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베버의 시대에도 ‘연명치료’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화적 발전 시기의 차이가 이 만큼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사례를 그의 입에서 들을 수 있다는 놀라움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환자가 ‘죽을 수 있는 권리’,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권리’ 등에 대해서 의학은 전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 법체계도 물론이다. 최근 존엄사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진 사례가 있었다. 여전히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길의 끝에는 분명, ‘자살의 권리’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전선은 쉽사리 존엄사 너머로 진행되지 않는다.


또 잡담. 자살의 재미있는 부분은 ‘나’의 문제일 때는 좀 더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나는 감히 ‘자살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고 죽음을 경험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죽음 이후의 남겨진 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해야 할 뿐이지 경험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영혼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영혼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이야기를 신빙성 있게 산 사람들에게 전한 예는 역사상 거의(장담은 못하겠지만) 없기 때문에, 죽음의 경험은 무지 속에 그대로 남겨질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그 경험을 통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해도 영혼으로서 다시 그 인간으로 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자살의 매혹’은 ‘나’의 울타리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타나토스의 주문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것이 ‘우리’ 혹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확장을 하면, ‘나의 죽음’에 대한 상상은 면밀하게 남겨진 사람들의 심리적 경험을 예상할 때라야 비로소 일말의 책임감을 다한 상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주위에 함께 살아 온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나의 존재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조건이 성립될 때의 이야기다. 나의 존재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고, 게다가 주위에 사람도 없다면, ‘자살의 책임’은 오로지 ‘나’의 사체를 다뤄야 하는 사람들의 고충 정도가 되겠다.


다시 본 궤도로 돌아와서, “탈주술화 된 세계”에서 마주 대하게 되는 세계는 ‘가치의 홍수’, 그의 말로는 ‘가치 다신교’의 세계이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학문은 이 선택의 장에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가치충돌을 중재하는 것이 학문의 본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의 ‘가능성’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사고 방법 등 사고를 위한 훈련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명료성을 확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한 가치 체계와 자신이 실천해야 할 선택지들의 관계를 뚜렷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좋은 낚시 법을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물고기를 잡아 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 ‘좋다’는 것은 그가 시종 ‘주지주의화’, ‘탈주술화’ 등을 말하면서 그가 전제하고 있듯이 ‘이성의 합리적 사유’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렇지만 선택의 차원을 고려하고 있으며, 앞에서 학자의 내적 자질을 이야기하면서 열정과 소명의식을 언급하고 있다. 주관적 선택과 합리적 인식의 ‘조화’(일종의 이성적인 조화)를 선(善)으로 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베버의 이러한 지적에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여전히 계몽의 기획이 포기될 수는 없으며, 학자들이 ‘예언자’가 되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막스 베버는 스스로 ‘학자상’을 그렇게 그려냈지만,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언자’의 수준까지 나아갔다. 물론 종교-정치적인 문제를 강단에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분류대로라면 예언자나 선동가가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완성된 예술이나 모범적인 학문 연구 방법의 지속을 언급하였듯, 베버 자신은 이미 그런 ‘범례적 기능’, ‘완성된 예술품’의 경지로 나아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남들보다 더 투명하게 현대 사회를 조명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가 활발히 활동한 시기로부터 약 한 세기가 흘렀다. 그가 학자의 숙명이라고 말한 것처럼 학문적으로 그의 이론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고, 새로운 질문을 낳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는 ‘질문’을 아직도 잉태시키고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책이 번역되고 있다는 것, 학문적 수준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또한 분명히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부와 삶의 목표 문제를 물었던 개인의 물음으로 돌아가면, 학문 그 자체가 답을 내려 줄 수는 없다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사실들에 대한 탐구, 거기에서 영감을 품고, 열정을 가진 작업이 어떤 ‘미미한 성과’를 내 놓게 될 것이라고 베버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또 이야기하듯이 ‘낡아지고’, ‘의미 없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라고 한다면, 적어도 공부를 업으로 삼으면서 거기에서 어떤 위대한 지적 성과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구차한 것일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러한 공부업자의 정신적 고양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한 믿음을 학자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적 자질로서 중요하게 평가되지만, 분명히 예언자나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베버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 자기모순이 있다. 일단의 주장 상에는 말이다. 그 전제가 가미된 학문적 작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연구 업적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전제를 비평이 제한된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역시 정도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베버적 의미에서도 베버는 준비된 예언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공부의 목적을 되묻는다면, 무엇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고, 그 질문을 내가 진행하고 있는 공부에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지적 허위의식의 잔영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다. 소위 지식인의 맹점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실천의 자리로 돌아가면 이야기는 반복된다. 허위의식은 지적 허영으로 나타나고, 지식을 권력으로 변환시키고 싶어 하는 이기적 욕망과 대면하게 된다. 어쩌면 오히려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기적 욕망을 긍정하면서, 공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그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3차 메타의 허위의식을 창조하는 것이 될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냥 머물던 곳을 배회할 수만도 없다.


여전히 나는 ‘당신은 삶을 살아오면서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 내 놓고 싶다.


또 옆으로 새는 이야기이겠지만, 영화 <Serendipity>의 마지막 부분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제목 그대로 이 말을 ‘우연하게 발견’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며, 역시 또 하나의 진부한 인용이 될 것이다.


The Greeks didn't write obituaries. They only asked one question after a man died: "Did he have passion?"


우연히 운명을 만나다. 아무래도 이 영화의 이야기였겠지만, 내가 더 기억하는 것은, 물론 여주인공, 케이트 베킨세일의 미소가 당연하긴 하지만, 이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마지막 대사 그런 류다(I am not me anymore, at least I am not the same me I was.). 그 영화에서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이게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식.


베버의 <직업의로서의 학문>을 읽는 재미는 사실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를 잡담하느라 많이 못했다. 조만간에 이 재밌는 이야기, 그러나 우울하기도 한 이야기를 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