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의 문제와 이종일의 묵암비망록

2017. 4. 15. 20:49글읽기


누가 '한글'이란 명칭을 만들었는가? 일견 그 '누가'를 확정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하면서도 누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한다. 국문학계에서 이 논의가 있긴 했던 것 같다. 물론 대체로 '주시경 선생이 지음'이라는 걸로 정리가 되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논의는 이윤재, 1929; 林奎, 1936; 김윤경, 1938; 최현배, 1940; 유열, 1948 ;김민수, 1973; 이응호, 1975; 고영근, 1983 등이다. 실상 결정적인 논의가 고영근의 1983의 논의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단편적인 언급만 되었다고 한다. 아마 그것을 결정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재, 1929, 〈한글강의〉, 《新生》 第2卷, 第9號, 14쪽.

임  규, 1936, 〈周時經論〉, 《正音》 15, 朝鮮語學硏究會, 34-36쪽.

김윤경, 1938, 《朝鮮文字及語學史》, 京城[서울]: 朝鮮語學會, 昭和13[1938].

최현배, 1940, 《한글갈》, 정음사.

유  열, 1948), 《알기 쉬운 한글 강좌》,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김민수, 1973, 《國語政策論》, 고려대학교출판부.

이응호, 1975, 《개화기의 한글 운동사》, 성청사, 22-24쪽.

고영근, 1983, 〈‘한글’의 유래에 대하여〉, 《白石趙文濟敎授 華甲紀念論文集》, 서울: 天豊印刷株式會社, 31-42쪽.

고영근, 2003, 〈‘한글’의 작명부는 누구일까: 이종일․최남선 소작설과 관련하여〉, 《새국어생활》 13권 1호 봄, 국립국어연구원, 131-159쪽.


고영근, 1983의 논의도 결정적 근거를 가지고 논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합리적 추론'이라는 형식 안에서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논의인 것 같다.


그런데 1996년 임홍빈이 '최남선' 작명설을 제기하게 된다. 朴勝彬, 1935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박승빈, 1935, 〈朝鮮語學會 査定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 대한 批判 (1)〉, 《正音》 제10호, 朝鮮語學硏究會, 25-44쪽.

임홍빈, 1996, 〈周時經과 ‘한글’ 명칭〉, 《韓國學論叢》 23,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1-41쪽.


박승빈의 '증언'에는 명확하게 최남선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崔南善氏 經營 光文會 內에서 周時經氏가 朝鮮語를 硏究하던 當時에 周氏는 漢字 全廢論者로서, 또 朝鮮文을 尊崇하고자 하는 感情으로, ‘諺文’의 名稱을 버리고자 하야 그 代用語를 考索하는 中에, 崔氏로부터 ‘한글’이라고 命名하야 周氏도 이에 贊同하야 爾後로 使用된 말이라.


최근 논의까지 고려하면 고영근은 주시경설을, 임홍빈은 최남선설을 주장하고 있다. 각 주장의 근거는 각각 '주시경파', '반주시경파'에 속하는 인물들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홍빈이 박승빈의 기록을 '신뢰'하는 근거로 삼는 건, 맥락 설명이 '자세'하다는 것이다. 고영근이 박승빈의 기록을 의심하는 것은 그가 반주시경파에 속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임홍빈의 반론은 설득력이 있다. 임홍빈, 2007: 14-15].


임홍빈, 2007, 〈‘한글' 命名者와 史料 檢證의 問題: 고영근(2003)에 답함〉, 《語文硏究》 35권, 3호, 7-33쪽.


두 주장 다 어떤 설을 확정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결정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주시경인지 최남선인지, 제3의 인물인지 아직 확정할 만큼 명확한 증거가 확보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시경파가 '한글'을 유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이종일


묵암비망록


이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종일'(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가 언급되느냐? '한글'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예로 그의 '비망기'가 거론되고 있어서다(남광우, 1989). 


南廣祐, 1989, 〈訓民正音의 再照明〉, 《水余成耆悅博士 還甲紀念論叢》, 인천: 仁荷大學校 出版部, 595-606쪽.


비망기의 해당 내용을 보자.


듣는 사람들이 숙의한 끝에 모두 좋은 명칭이라 말하여 이에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한글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글 전용을 위주로 하는 신문의 발간을 결정지었다. (聽者熟議 皆曰絶好之名稱也 爰決帝國新聞而한글爲題記何如 多曰亦好也 然則한글專用爲主 發刊決定也矣) (〈묵암비망록〉 1898년 7월 4일자)


또 다른 곳에도 '한글'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나는 말하기를 신문체제는 부녀자계층을 위하여 순국문(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라 했는데, 여럿이 말하기를 沃坡의 의견에 대찬성이라고 하였다. (余曰體制則爲婦女子階層 純國文(한글)使用最緊要事也, 多沃坡意見大贊成也)  (〈묵암비망록〉 1898년 8월 1일자)


[cf. 임홍빈, 2007에서 연도표기를 '1989'로 하고 있다. '1898'이 맞다]


임홍빈, 2007의 인용. 연도 표기가 잘못 되어 있다.



고영근은 남광우(1989)의 논의를 받아 2003년에 임홍빈(1996)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썼고, 이에 대해 임홍빈이 2007년에 이를 재반박했다. 임홍빈(2007)은 '옥파비망록'(묵암비망록)에 대해서 사료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1. 옥파비망록(묵암비망록)의 원본이 분실되었다.

2. 현재 남겨진 옥파비망록은 원문 텍스트 1898년 1월 1일-1902년 3월 30일분, 번역 텍스트는 1898.1.1-1922.2.27까지임.

3. '한글' 나오는 부분 맥락보면 이미 있는 용어 사용. 새로 '한글' 쓰면 왜 그 표현 쓰는지 이야기하게 됨.

4. '한글' 표현이 번역자, 편집자에 의해서 삽입 혹은 부기된 경우로 보임.

5. 1908년 〈대한협회회보〉 2호게 '論國文'이란 글 썼음. 여기서 '한글' 언급 안 함.

6. 〈제국신문〉에 실린 이종일 논설에서 '언문'이라고 쓴 것을 옥파기념사업회가 펴낸 《沃坡 李鍾一先生 論說集》에는 '한글'로 바뀌어 있음.

7. 옥파비망록 발굴 발표한 이들, 해당 발표글[번역문]을 이해하기 쉽게 용어를 바꾸었음. [경성→서울, 외국인명에 한글병기 등]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옥파비망록의 현재 버전으로는 이종일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분명 의심스러운 것이고, 이종일은 그 명칭을 안 썼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는 주장이다.


옥파 이종일에 대한 연구는 흥미롭게도 1978년 이현희가 〈묵암비망록〉에 관한 연구를 내 놓으면서 시작된 것 같다. Riss를 통해서 찾아본 바로는 78년 이전에 이루어진 이종일 선생에 대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경향신문 1978년 2월 28일자 신문(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묵암비망록' 발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 1978년 2월 28일 '묵암비망록' 발굴 소식



이 자료가 《한국사상》 16집(1978)[몇 권에 더 걸쳐 소개됨]에 이현희 선생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임홍빈이 밝히듯이 원문 일부와 번역 일부가 몇 차례에 걸쳐서 이 지면을 통해서 소개되었다.


우선 위 사진의 기사를 보면, ("한국현대사 연구의 활력소")


기미독립운동 선봉-묵암비망록 발견

...

3.1 운동당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의 실무책임자였던 묵암 이종일 선생(1858-1925)의 비망록과 일기가 최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에서 발견됐다. … 성신여사대 이현희 교수(한국사)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사장 이종일)의 총무였던 장효근씨의 3남 장영환씨 집에서 찾아낸 묵암의 비망록은 한 장본(韓裝本: 한지에 인쇄한 것을 모아 5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색의 끈으로 책등을 묶어 책으로 만든 것[옮긴이 주]) 25권과 조선민력(朝鮮民曆)에 일기체 기사로 정리한 15권 등 40권으로 묵암이 제국신문을 펴내기 시작한 1898년부터 1925년까지의 중요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다. … 이교수는 “묵암의 일기에 ‘고종이 죽음으로써 일어나는 민족의 원한을 민중에게 확산시켜 제2의 동학혁명을 일으키자’는 기록이 보인다”면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에도 일인에게 학살된 천도교인 10만 명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항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 사실도 기술돼 있다”고 밝혔다. … 묵암의 비망록을 정리 중인 이교수는 “실학-동학-개화로 이어지는 한국근대사상사 체계화의 결정적인 자료의 출현”이라면서 “묵암사상을 통해 저력 있는 한국문화의 힘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이 내용을 보면서 '동학혁명'이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등장했을지 궁금했다. 묵암이 '실학-동학-개화'의 관련성을 이야기했다면 광복 이후 학자들보다 앞서서 근대의 한국의 자립적 사상 흐름을 짚어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얼마나 사실일지 궁금해 지는 부분이다. 여튼 이렇게 '활력소'가 될 자료가 그 발굴자에 의해서 홀연히 사라진다.


우선 그 사건이 있기 전에 이현희 교수는 《3.1 운동사론》을 펴낸다. 이 책은 "「張孝根日記(장효근일기)」「自主獨立宣言文(자주독립선언문)」「黙菴備忘錄(묵암비망록)」등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현희 교수가 책을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묵암비망록'을 분실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79년 7월 27일자 기사. "獨立운동史料 「黙菴備忘錄」분실" 기사를 보면 6월 15일 아래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묵암비망록 분실 동아일보 기사. 1979. 7. 27.



차 위에 자료를 놓고 달려서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양이 36권에 달한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유족들은 기사에서 보듯이 '분실 사실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원소장자인 장영환(이종일의 측근 장효근의 3남)이 이내 고소를 했다는데, 8월 18일 돌연 소를 취하한다.




특히 다음 진술들이 주목된다.


장씨측은 소취하와 함께 해명서를 발표, 소를 취하하게 된 동기에 대해 “그 동안 이교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료가 분실되었음을 확인함으로써 그간의 오해가 풀렸다”고 밝혔다. … 이밖에 해명서는 고소장에서 ‘이교수의 원고료사취운운’ 등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은 분실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이 교수도 분실에 대한 도의적 책임으로 ‘장효근일대기’를 저술할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특히 해명서는 분실된 책의 내용 중 75%는 이미 공개됐거나 출판원고로 보관돼 있어 학자들의 연구에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첨가하고 이번 사건으로 이 교수의 명예가 훼손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

한편 ‘묵암비망록’의 분실로 기념사업이 중단위기에 놓인 묵암기념사업회 측은 여전히 분실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장씨 측의 소취하에 대신할 만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장영환씨 측과 이현희 교수 사이에 '거래'가 있었고, 이를 통해서 사건을 덮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원문의 석연치 않은 분실 사건과 원문의 원소유자 측의 석연치 않은 고소취하.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생존자들이 있다면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로 인해서 '묵암비망록'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증폭되는 것 같다. 편역자에 의해서 '개변'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묵암비망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 용어상의 문제로 보인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도 위 석연치 않은 사건이 시사하고 있다. '묵암비망록'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점이 이제까지 제대로 검증되지는 않은 것 같다.


1. 학계에 자료가 발표된 지 1년 남짓이 지나서 '어처구니 없이' 원본 자료가 사라졌다.

2. '한글'과 같은 용어가 삽입된 것은 후대의 가필이라고 할 때, '민중', '실학', '개화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과연 옥파 생존시 사용하던 개념과 통용되는 것인지 후대의 개념과 통용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내용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당대의 글인지, 후대의 창작인지 판단해야 할 것 같다.


우연한 계기에 '이종일'을 파보다가 이상한 걸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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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2020.06.18 08:01

    애매하고 의아해 했던 내막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