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는 누가 한 말인가? '아마도' 헤밍웨이, 아님 새뮤얼슨?

2017. 6. 19. 11:49etc/인용

전에 인용을 한 바에서 그 말이 헤밍웨이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건 이야기했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 헤밍웨이


과연 그런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했던가? 영화 '코치 카터'의 경험, 네팔 지진 고아 사진(실제로는 베트남 아이들)에 대한 경험이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기억은 '전형화'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수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인용구도 그런 특성에 따라 출처가 구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대번에 이런 게시물을 볼 수 있었다.



들어가 보면 이렇다. 옆에 붙어있는 광고에는 '헤밍웨이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책이 소개되고 있다. 문제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글을 보면, 인용 조사자에게 이 말을 누가 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 나온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순화한 번역임) 이 말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했는지, 아놀드 새뮤얼슨이 했는지, 버나드 맬러머드가 했는지 아니면 출처가 불분명한지 묻는다. 이런 물음은 이 사이트의 '형식'이 아닌가 의심스럽긴 하다. 저렇게 사람들 나열하면서 하는 질문자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사람이 아닌가. 어쨌든 헤밍웨이 산문의 문체, 여백과 직설이 여러 번 초고를 고쳐 써서 얻었기에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그에게 돌려지고 있다고 한다.


인용조사자는 답변을 한다(이하 거의 번역에 가까움).


헤밍웨이는 1964년 사망했는데, 아놀드 새뮤얼슨에 의해 사후에 출간된 헤밍웨이에 대한 회고록(1984) '헤밍웨이와 함께: 키웨스트와 쿠바에서의 한 해'(With Hemingway: A Year in Key West and Cuba)라는 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국내에 《헤밍웨이의 작가 수첩》(문학동네, 2015)으로 나와있다.


새뮤얼슨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9세였던 1934년 플로리다 키웨스트로 여행을 가서 헤밍웨이를 만났다고 한다. 새뮤얼슨은 헤밍웨이의 글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글쓰기 지도를 원했고, 헤밍웨이는 자신의 고깃배 선원을 필요로 해서 새뮤얼슨과 헤밍웨이가 10개월 정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을 새뮤얼슨은 글로 써 놓았는데, 출판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1981년 새뮤얼슨이 죽자 그의 누이가 그 원고를 발견하고 1984년에 출판했던 것이다. 그 원고에 헤밍웨이가 새뮤얼슨에게 하는 충고가 담겨 있었다.



글을 쓰는 데에 기계적인 부분이 많다고 낙담하지 말게. 원래 그런 거야.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을 적어도 쉰 번은 다시 썼다네. 철저하게 손을 보아야 해. 무얼 쓰든 초고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자네는 온통 흥분되겠지만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하지만 작업 요령을 터득하고 난 후에는 독자에게 모든 걸 전달해서 예전에 읽어본 얘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실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게 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해. - 《헤밍웨이의 작가 수첩》 中


국내 번역본의 순화 수준은 상당하군요. -_-; 


이 내용이 1985년 《에스콰이어》 잡지의 '아빠 어디에요?: 헤밍웨이 전기의 바다에 빠져서'에서 위 구절이 소개되어 회자되게 되었다고 한다. 



1989년 William Safire와 Leonard Safir가 편집한 "Words of Wisdom: More Advice"에서도 《에스콰이어》와 같은 텍스트가 인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다른 인물은 버나드 맬러머드(Bernard Malamud)이다. 1997년 "말하는 말[馬]: 버나드 맬러머드의 삶과 작품(Talking Horse: Bernard Malamud on Life and Work)"이라는 제목의 모음집이 출간되었다. 그 책에는 그가 1981년 베닝턴 칼리지에서 한 졸업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실려 있다.



초고를 쓴 후 끊임없이 고치게 된다. 고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어떤 것은 운좋게 떠오른다. 다른 건 열심히 다시 생각하길 요구한다. 수정은 재고에 의한 끝없는 창조이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끄집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우게 된다. 천재가 아니라면 어떤 초고든 의심하라.


인용 조사자는 새뮤얼슨이 그러한 말을 헤밍웨이에게서 들었을 개연성을 인정한다. 다만 1934년에 있었던 일이 후에 기록되어 1984년에 빛을 보았다는 점이 확신을 품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말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헤밍웨이가 말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새뮤얼슨의 기록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렵다(너무 불신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기는 하다). 새뮤얼슨이 지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표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맬러머드의 예) 특별히 누구의 작품으로 여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은 새겨 들을 말이다. 소설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글쟁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아마 이 이야기를 확장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적용할 수도 있으리라. '초보자는 죄다 고문관이다'로 변형해 볼 수 있겠다.

  • 프로필사진
    BlogIcon Abigail2021.02.20 09:18 신고

    헤밍웨이의 이야기로만 많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재미있는 사실이라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맞아요, 무슨 일이든지 처녀작은 어쩔 수 없이 어설플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나이키의 "저스트 두잇"이 떠오르네요 문득.

    • 프로필사진
      BlogIcon steinsein'2021.03.04 14:23 신고

      네. 이러한 오귀인 사례는 무척 많은 것 같더군요. ^^

      제가 다룬 다른 사례는 'our deepest fear'라는 글을 넬슨 만델라가 썼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미지 중에도 '네팔 지진 고아'로 알려졌던 '베트남 아이들' 사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