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읽기 (3) - 사명 (2005/02/21)

2007. 2. 26. 18:50글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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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야뽁에서 야곱의 싸움, 유화
 

세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새’를 말한 익숙한 구절보다도 내게는 <데미안>에서 다음의 구절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람마다의 참된 천직은 오로지 하나,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일뿐이다. ... 사람마다 각자의 본분은 결코 임의의 것이 아닌 자기의 독자적인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자기의 내면 속에서 완전하고 철저히 살아가는 것이다.


- ‘야곱의 싸움’ 말미, <데미안> 중


사춘기도 다 지났을 시절에 읽었으니, 어찌나 땅을 치고 아쉬워했을까. 이미 삶의 길에서 어느 정도 흘러가 버려서 나름의 관성을 지닌 채 살아갈 때였으니. 변화가 쉬울 수는 없는 법이니. 어쨌든 익숙한 속담을 떠올리며, 시작이 반이다, 새로운 시작을 꿈꿀 도리밖에는.


이 구절은 각자의 ‘사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그런 사명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수준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고 ‘신적 존재’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먼 이야기이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상상은 그것이 집단적일 때 어김없이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그다지 집중할 소재거리로, 즉 애초의 사명을 명확히 드러내는 데 좋지 않은 상상이다.


그 ‘사명’은 오로지 ‘나’와 그리고 ‘우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적인 운명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에 ‘나’에만 초점을 둘 수는 없다. 어쨌든 이것은 주체적 의미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나름의 세계 지평의 필요. 자기가 그려내는 세계의 모습은 ‘해야 할 일’을 또한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상상력.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그 물음의 답은 세계를 보는 자기 시각에서 발견될 수 있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살아가려는 생명체의 몸부림.


삶은 의미 없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각자의 사명, <데미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사명, 생명체로서의 사명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