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기 수리와 노인 수리기사, 그리고 '보통 노동자의 이야기'

2018. 3. 10. 12:35etc

한 5년 된 청소기가 있다. 



대충 위의 물건과 비슷한데, 위 물건의 과거 버전으로 추정된다. 호스부분과 본체부분의 접촉 불량으로 청소 중에 끊기는 문제가 언젠가부터 있었지만 대충 줄로 묶어서 쓰고 있었는데, 최근에 자꾸 경고음이 떴다. 보통 앞의 먼지통이 가득차면 비우라고 울리곤 해서 이를 비웠는데도 경고음이 계속 나서 수리센터에 방문하게 되었다.


수리센터에 갈 때면 몇 가지 풍경이 예상된다.


1. 비싼 수리비로 멘붕에 빠지는 나


2. 수리하면서 제품을 잘못 사용했다고 소비자를 갈구는 수리기사


3. 제품의 결함을 따지면서 흥분하고 있는 나


이번엔 사실 소생불능의 고장이나 수리비가 많이 드는 고장일 경우에는 포기하고 '무선 청소기'로 갈아탈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1, 3은 애초부터 가능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리센터에서 내가 겪은 일은 내 예상과는 한참은 벗어난 것이었다.


우선 수리기사가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인이었다. 이럴 경우 노인 특유의 참견과 꼰대짓이 동반되면 정말 대책이 없는데, 이분은 그런 것 없이 청소기를 보고 '무엇이 문제입니까'라는 질문도 없이, 일단 '접촉 불량' 문제를 인지하고 무엇이 문제고 뭘 교체하면 해결된다고 하면서 뚝딱뚝딱 수리를 진행했다. 사실 난 그 부분을 수리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뭐. 


사실 위 제품의 호스와 본체 연결부위는 구조적으로 접촉 불량이 자주 날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다. 청소기를 쓰면서 청소기를 끌고 다니게 마련인데, 그러면 해당 연결부위에 힘을 받게 되어 있다. 아마 이번에 고친 것도 1-2년 안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무선으로 가고 싶은데, 마눌님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청소기 전담맨으로서는 좀 더 편리한 청소기구에 눈이 갈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무선은 비싸니까;;


어쨌든 연결부위를 뚝딱 수리를 하고 '더 불편하신 건 없으시냐'고 물으시기에 경고음과 모터 소리의 변화를 이야기하니, 청소기를 켜 보시고는 이내 내부 필터 청소가 안 되어 그렇다고 알려준다. 결국 사용후 내부 청소를 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내부 필터 중 하나가 약간 파손된 관계로 내가 익숙한 청소주기보다 빨라졌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이 노인 수리기사는 심상하게 내부 필터를 에어컨프레셔로 청소하고 파손된 필터를 교체하였다. 별다른 반응없이 말이다.


그러고 나니 이 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수리센터에서 노인 수리기사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승진해서 직급이 올라가든지, 퇴사하여 자리를 지키지 못하든지 해서 '노인 수리기사'가 흔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일처리도 능숙하고 고객 응대도 문제가 없었다.


이런 분들이 일생의 노하우를 현장에서 펼치시는 것이 참 좋고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사님 사진도 한 컷 찍었다.



이런 분이 곧 정년퇴임을 하신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65세까지 충분히 일하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소기를 들고 서비스센터를 나왔다. 그리고 예전에 생각했던 글감 하나가 떠올랐다. '보통 노동자의 이야기', '생활세계의 귀감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보통 사회적으로 기념되는 사람들은 큰 업적을 쌓은 사회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도 그들의 '비범성'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있다. 아주 두드러지는 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차이는 될 것이라고 본다.


기회가 된다면 해 보고 싶은 작업이다. 아마 숱한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직업 현장을 쫓아다니는 일이 될텐데,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 되리라 믿는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세상살이 이야기'이니까 나에게는 분명 또다른 세계와의 만남이다.


이 생각은 사실 고등학생 때인지 대학생 때인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쯤 해 봤던 한 알바의 경험 이후로 품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근해 어업 종사자셨다. 아버지를 어부로 인식했을 뿐 그의 삶이 실제로 어떻게 펼쳐져 있고, 그의 고통, 삶의 애환이 무엇인지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해 보기 시작한 건 좀 더 어렸을 때였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왼손 손등에 상처를 입고 붕대를 감았는데 피가 흥건했던 모습을 하고 집에 들어오셨다. 그의 일이 참 힘들고 위험한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런 생각이 당시에는 아직 관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인이 될 즈음해서 아버지의 직업 현장에서 알바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근해에서 잡은 물고기를 배에서 뭍으로 옮기는 일이다. 이걸 보통 '고기 푼다'고 말한다. 물고기는 규격화된 나무 상자에 담겨져 있고 그 위에는 얼음이 채워져 있었다. 이런 하역 작업이 지금은 자동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손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에 선착장에 나가서 이 일을 한 적이 있다. 나름 짧은 시간에 하루 일당 정도를 받을 수 있는 '꿀알바'였다.


물고기 하역 작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뱃일에 대해서 실제적인 경험을 약간 해 보았다. 그리고 참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이후로 그 알바를 다시 해 본 적은 없다(새벽 기상과 노동 강도 문제도 있었지만 나의 생활권이 바뀌었던 게 크다). 아버지와 함께 바다에 나가서 실제 하는 일들을 보고 어부들을 인터뷰 해서 글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긴 했다. 당시로서는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어서 시도해 보지 못했다. 묵히던 중에 생각해 보게 된 게 '보통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청소기 수리 기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 이야기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