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되는 기독교의 모습을 찾아서: 기독교민속신앙 연구를 향해 #1_교회 설교를 듣다(1)

2018. 10. 7. 19:34연구노트

오랜만에 처가에 갔다(이 글을 쓰는 지금-10월-으로부터 한 두 달 전의 이야기다). 그것도 주말에. 주말에 처가에 가면 응당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가 '교회 출석'이다. 교회에 가는 일이 귀찮기는 하지만 '신실한 개신교도'이신 장인, 장모님께 조금이나마 점수를 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인사해야 하고, 듣기도 부르기도 부담스러운 가사의 찬송가도 불러야 하고, 도시 그냥 들어 줄 수 없는 설교를 들어야 하기에 교회에 가는 일은 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요즘 마음을 달리 먹고 있다.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를 하는 심정으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고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일이다. 전혀 종교 생활에 진지한 관심(실제 믿는 측면에서)도 없으면서, 관찰자로서 그러한 사람들을 관찰한다는 건, 뭔가 염치없는 짓을 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동기부여를 하지 않으면 개신교 신앙을 갖지 않은 자가 개신교 의례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신앙생활을 '신실한 개신교도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고 싶지 않다면 그 바람도 존중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많이 한 듯


내가 딴지스트지만 분명 세상에는 딴지 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맞춰 줄 수밖에. 그렇지만 맞춰줘야 하는 그런 사람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기는 어려운 것 같지만.


사설이 길었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바꾸니(연구 목적), 그것이 그렇게 곤욕스럽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장면 하나하나가 '개신교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연구질문은 '실제로 개신교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은 인지종교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교리대로, 종교적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하진 않는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과 실천은 많은 인지적 제약 하에서 어떤 일반적 패턴을 보여준다.


#신학적 올바름


가령 '신학적 올바름'theological correctness[각주:1]에 대한 연구를 보면, 사람들이 신 관념을 실상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교리화된, 신학적 이론으로 정교하게 설명되는 것(가령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은 따로이자 동일체라는--같은 교리)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따르면, 신은 어디에나 있고(동시에),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 해당 내용을 회상토록 했다.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신이 위험에 처한 남자의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어떤 여자의 분실한 지갑을 찾아준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피험자들은 이렇게 회상하곤 한다. '신이 위험에 처한 남자의 생명을 구해 준 다음에 어떤 여자의 분실한 지갑을 찾아줬다.'고 말이다. '동시'가 '다음'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는 건 너무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회상할 때는 '인지적 부담'을 주어 많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이럴 때 신은 신학적 견해보다는 직관적 심리학에 의해 그려진다(인간 행위자와 같은 존재처럼 신을 이해하기, anthropomorphism). 신학적 견해를 엄밀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인지적 부담'의 유무로만 이런 직관적 심리학에 기댄 신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의 기능


이성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 능력이라고 이해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정당화'와 '설득'과 같은 의사소통 과정의 정보 처리에 특화된 프로세스로 이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각주:2] 진화론적 접근에 의한 이성에 대한 설명은, '내로남불'이 왜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말로 정리된 것, 올바르다고 주장되는 것은 하나의 '간판', '껍데기' 같은 것이다. 이런 겉모습이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유혹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나는 그런 관점에 따른 '개독론'을 전개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성의 기능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르다. 즉, 모두가 위선자다. 더 큰 위선자 찾기는 정치 담론이나 가쉽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개신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이야기한 인간 사고방식의 특성을 고려해 보면,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에 대한 조금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교회설교를 들어 봤다. 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뤄야겠다. 점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겠지만... 단, 다음 글에서 위의 관점으로 설교 내용을 재해석한다는 건 아니다. 그 내용은 종교문화 연구자로서 교회의 설교를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록하는 것에 가깝다.


To be continued...

  1. Justin L. Barrett, THEOLOGICAL CORRECTNESS: COGNITIVE CONSTRAINT AND THE STUDY OF RELIGION, Method & Theory in the Study of Religion, Vol. 11, No. 4 (1999), pp. 325-339. 여기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jstor.org/stable/23555537?seq=1#page_scan_tab_contents; 파스칼 보이어, 《종교 설명하기》, 159-161; 463-466 참고. [본문으로]
  2. 위고 메르시에, 당 스페르베르, 《이성의 진화》, 최호영 옮김, 파주: 생각연구소, 201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