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 성배, 그리고 기독교"_'실-종(실눈 뜨고 본 종교) 리포트' (1)

2018. 12. 18. 10:44실종리폿

2018년 한 해 목표 중 달성한 것이 거의 없는데, '하면 되는' 목표였던 종교학 팟캐스트 만들기는 유일하게 달성한 목표였다. 이곳에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며 쓴 글을 기록해 둔다.


해당 방송

녹음은 11월 하순에 방송 업로드는 12월 18일에 이루어졌다. (링크: http://www.podbbang.com/ch/8112?e=22796312)




〈심옹의 ‘실눈 뜨고 본 종교 보고서’/‘실-종 리폿’〉


저는 안경을 벗으면 뵈는 게 없습니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을 찡그리며 실눈을 만들어서 봐야 형체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익숙하게 잘 알던 것들이 낯설어집니다. 실눈을 뜨고 겨우 파악한 실체는 그 동안 다른 것에 관심이 쏠려서 보지 못했던 것을 종종 보여주었습니다.


종교도 그렇게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종교는 분명한 듯 하면서도 신기루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이해해보려고 하면 말입니다. 내로남불의 종교,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종교, 종잡을 수 없어서 외면하고 싶은 종교, 사실 별 관심이 없는 종교... 괜찮은 종교는 이미 사라진(실종)지 오래라고 여겨지는 종교의 세계...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라는 뚜렷한 실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그런 시각이 위와 같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기존의 관점과 거리를 두고 실체를 다시 파악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하곤 합니다.


‘제대로 보기’가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포착하기 위해서,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는 종교의 본 모습을 찾아서 '실눈'을 떠보고자 합니다. 그 동안 익숙한 시각에서 잘 포착되지 않았던 문제가 그 현상의 중요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조금 시각을 바꾸고, 최대한 집중해서 들여다보기로서 ‘실눈 뜨고 보기’, 과연 흐릿한 상이 잡힐지, 아니면 계속 뵈는 게 없을지, 결론이 어떻게 날지 지켜봐 주시죠.



첫 번째 이야기: 예외적 기독교


제목 수정 "아서 왕, 성배, 그리고 기독교"


#1_아서 왕 전설과 예수의 성배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eFz0RoRd38


저는 ‘아더 왕’으로 알고 있었던 ‘Arthur’ 아써 왕,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잘 아시죠. 저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읽은 게 아니라 만화로 보고 영화로 본 세대입니다(이번에 찾아 봤는데, 1979년 일본에서 방영된 ‘원탁의 기사’라는 만화더군요. 국내에서는 1985년 ‘아더왕’이라는 이름으로 KBS에서 방영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의 왕인지도 몰랐지만(아주 어렸을 때 봤으니 나라이름이 설혹 나왔더라도 알 리가 없었죠), 아써 왕 이야기는 과거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원탁의 기사가 나오죠. 어렸을 때는 ‘원탁’이 둥근 테이블을 지칭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사들의 ‘칭호’로 생각했지요. 뭐니뭐니 해도 아써 왕 하면, 바위에 박힌 검을 뽑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누구도 뽑을 수 없었던 검을 약관의 젊은이가 뽑아내고 단지 그것만으로 왕이 되는 이야기 말이죠.


이미지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684744&memberNo=23221424


아써 왕 이야기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이 기억에 남습니다. 글로 된 ‘아써 왕 이야기’를 본적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써 왕 이야기에서 성배 찾기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집니다. 이런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아써 왕 이야기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역사적 사실을 과장해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전설’로 불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써 왕 이야기가 아주 옛날에는 지금(책으로 정리된 것을 기준으로)과 많이 달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로마화 되고 기독교화 되기 이전에 있었던 켈트족 신화가 기독교화 되어 변형된 것이 아서 왕 전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배’와 같은 보물이 켈트족 버전에서는 마법 보물 ‘다아다의 가마솥’이 기독교화 된 것이라는 설도 알게 되었지요.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johnkchung/6824271?categoryId=251177 "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의 환영이 나타남을 보고 감격해 하는 그림"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4%B1%EB%B0%B0(Fate%20%EC%8B%9C%EB%A6%AC%EC%A6%88)


아써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으려한 이유는 성배에 깃든 신의 은총이 소유자에게 전해져 좋은 운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써 왕 이야기만이 아니라 많은 기독교 전설에서 성배는 그 잔에 무엇이 채워지는가와 상관없이 좋은 영향을 소유자에게 끼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모티프를 이용한 여러 영화에서 성배는 때론 영생을 때론 치유를 때론 젊음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일본 애니 Fate 시리즈 등). 사물에 깃든 신력(神力)이 소유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관념은 그러나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가 아니던가요? 예수와 함께 못 박혀 죽은 범죄자마저도 예수를 영접함으로써(구원자라고 여기는, 신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믿음)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2_신력의 기적과 magic(마술/마법/주술)


기독교 세계에서 성배는 성궤와 함께 성물로 여겨집니다. 개신교에서는 그런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성물 숭배의 경우는 그렇지만 개신교에도 ‘신력이 깃든 물건’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요. 성인숭배에서 성유골 숭배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물건들이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물건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깃들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력을 가진 물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세계에서 이러한 물건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발휘되었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적’으로 불리는 현상들은 주로 치병이 많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다거나 아픈 자가 낫는다거나 하는 것인데, 성인 혹은 성유골과의 접촉으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와 다른 종교(종종 더 열등한 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로 여겨진다)나 같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도 이단이나 사이비로 후에 규정된 종교 활동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신비한 능력이 깃든 물건’에 대한 신앙은 마법이나 주술을 믿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성유골 숭배가 이교도의 습속(paganism)으로 치부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물론 이러한 숭배양식은 기독교(가톨릭)의 전통으로 승인받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다른 한편으로 주술적 믿음과 실천이 기독교 안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늘 나왔습니다. 이단으로 배제할 수 없는 경미한 수준(?)인 경우를 두고 기독교인들 혹은 많은 지식인들은 주로 일반 대중 신도들의 무지나 타락으로 그러한 신행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러한 것은 참된 기독교의 신행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령 성경 구절을 주문처럼 쓰는 경우나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경우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원천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혹은 ‘원시종교’나 ‘민속신앙’에서 찾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주술’과 ‘주물’ 개념을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 또는 그 술법”이라고 적고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적인 힘을 빌어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려고 하는 기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모종의 ‘기술’(테크닉)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술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는 사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술적 신행은 비도덕적인 동기로 이루어지며,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사실 도덕과 주술의 대비는 주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 존재’, ‘신비한 힘’, 그리고 ‘인간의 소망(혹은 의도)’라는 요소입니다. 전자의 두 요소는 종종 주술적 신행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곤 합니다. 그래서 주술은 일종의 도구적 성격(테크닉, 기술로 불림)을 갖습니다. 주술적 술법이라는 것이 자연의 신비한 힘을 인간이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비밀스러운 스킬을 말하는데, 이러한 술법은 정해진 절차를 수행하면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정해진 결과가 발생하지 않으면 준비 과정이나 절차 수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소위 ‘부정 탔다’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되죠). 그래서 ‘기계적인 과정’으로 생각해도 될 정도입니다.



주문과 주물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주문은 그것을 암송하면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그런 글귀를 말하는 것이죠. 마법사나 샤먼의 주문은 보통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말입니다. 그 말이 특별한 힘을 갖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 존재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일 수도 있고, 그릇에 액체를 담을 수 있듯이 자연의 원리에 따라서 신비한 힘이 담기는 용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주술적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초자연적 존재를 통하거나 특별한 의례적 절차를 수행하거나 해서 ‘신비한 힘’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주물(fetish)이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은 주술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유일신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술의 관념과 거리가 멀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초자연적 존재(귀신, 영혼, 잡신 등)의 자리에 유일신이 대응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문자나 물건이 갖게 되는 신비한 힘이 오로지 신이 매개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의 신행이 주술적 신행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주요 특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격적인’ 유일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신과 접촉한 사물, 글귀, 사람이 신의 ‘은총’을 입은 것이지, 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물질적인 힘으로, 지향성이 없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에 대한 의례를 개인의 복리를 추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신에 뜻에 부합하게 행동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도덕성을 함양케 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며, 사익을 추구해서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주술적 실천과 대비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말, 언술, 레토릭 속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모호한 것입니다. 기도가 주문이 되기도 하고, 신에 대한 예배가 신과의 주고받기의 거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력은 그러한 주고받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의도에 따라서 활용할 수 있는 물질적 도구처럼 다뤄집니다. ‘금 나와라 뚝딱!’에 사용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말입니다.


1915 프랑스. 비행기를 축복하는 기독교 사제의 모습.


#3 위선적 기독교? 아니면 타락한 인간?


주술적 관념과 실천을 기독교인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오점을 들추는 것이거나 적어도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


종교의 타락?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비난하는 것이든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든, 네버엔딩 스토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한 신앙 내지는 신념과 동시대인의 타락한 신행의 대비는 인간이 역사를 써 온 이래로 줄곧 기록되었습니다. 기독교에 국한해서 보아도 기독교 역사의 첫 장에서부터 현재까지 위선과 타락에 대한 기록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죄 많은 인간 본성으로 그 원인을 돌립니다. 그러나 너무 속편한 답변인 것 같습니다. 잘 된 것은 내 탓, 못 된 것은 남 탓하는 식이니 말입니다. 원인이 무엇인가는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절대적 진리(진실)를 강조하면서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태도가 ‘예외’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외적 위치에 선 것은 그와 비슷해 보이는 다른 것들과 결코 ‘비교’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이 ‘불경’한 일이고,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고, 진리/진실을 부정하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주장되고 있는 절대적 진리(진실)를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다면, 그런 일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종교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기독교의 진리를 신봉하는 것은 아닌데도 ‘예외적 권리’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종교라는 개념도 실상 기독교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신, 경전, 신자공동체, 성소(temple), 사후세계 등이 갖춰져 있어야 ‘종교’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가 가장 명확하게 종교 같습니다. 당연하겠지요, 서구인들이 기독교를 중심에 두고 종교 개념을 만들어 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세계의 종교적 전통들은 기독교에 비해서는 어딘지 ‘모자란 종교’가 됩니다. 아니 아예 ‘종교’로 불리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그런 두드러진 대상이 유교와 무속입니다. 이 이야기도 차차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도 사실은 이렇게 특정 전통에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빙빙 돌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고양시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세계와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타락해 가는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4_예외를 무너뜨리면, 종교를 넘어서 인간이 보인다


종교인들만 주문을 외고, 주물을 사용하는 등 주술적 사고와 실천을 할까요? 시야를 좀 넓혀 볼까요? 


많은 분들이 '징크스'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건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는 상황, 사물, 사람 등에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징크스(Jinx)는 '나쁜 또는 부정적인 운을 끌어들이는 저주 또는 그러한 속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징크스'를 갖기도 합니다. 없는 사람도 물론 있죠. 그리고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성행하기도 합니다. 주로 스포츠 분야에서 많이 이야기되죠.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 착용했던 의복이나 장신구가 문제가 되거나 반대로 좋은 일이 있었을 때 착용했던 의복이나 장신구가 애용되기도 합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지는 않지요. 정말 특별한 경우에 '아껴서' 써야 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곤 합니다. 사물도 있지만 행위절차가 그러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 한 행동은 다음에 '금기 행동'이 될 수 있고, 좋은 일이 있었을 때 한 행동은 다음에 '준수'해야 할 행위절차가 되기도 합니다.


야구 선수들 중에 그런 행동절차를 잘 보여준 사례로 저는 이치로, 커쇼 등이 생각납니다. 이들이 타석이나 마운드에서 보여주는 행위를 보면 늘 반복되는 특정한 행위 패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치로 타격폼의 시그니처하면 바로 손을 뻗어 배트를 수직으로 들고 어깨에서 옷을 약간 잡아 당기는 행위죠. 커쇼는 투구 셋포지션에서 두 손을 높이 쳐드는 행위가 특징이죠. 삼진을 잡을 경우에 마운드를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루틴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불운을 막기 위한 행위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도 있습니다. 시험을 칠 때 죽이나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든지, 수험생 선물로 떡, 휴지, 포크, 도끼 등이 쓰이는 경우가 있지요.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지 말라거나 밤에는 손톱을 깎지 말라는 말이 있죠.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를 먹을 때 물고기를 뒤집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집에서 다리를 떨고 있으면 '복 달아난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죠. 이런 행위들은 불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불운을 부르는 행위에 대한 금기나 그걸 막는 행위가 어느 사회에서나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종교의 유무와 전혀 상관이 없지요.


사물이 특정한 '가치'를 갖는 경우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 사물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여겨지게 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스타의 물건, 연인의 물건 같은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물은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지거나 쓰는 경우에 소유자로 하여금 불편함 내지는 분노를 유발시키죠. 간혹 해당 사물의 가치가 손상되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물건은 다른 사람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거나 '다른 사람 접촉 금지'의 규칙이나 명령을 내 걸게 되지요. 이런 물건들 중에 휴대가 용이한 어떤 물건들은 '행운의 부적'이 되기도 합니다.


종교와 관계 없이 유행하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물건'들도 많이 있죠. 그러한 것들이 상품이 되어 판매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판매 중인 '함싸목거리' 이미지 출처: http://shopping.interpark.com/product/productInfo.do?prdNo=1802161356&uaTp=1


'행운의 돈'으로 여겨지는 2달러


시와 문학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 이런 사고 패턴과 친연성이 있습니다. 비유는 다른 것을 '같다'고 하거나 일부로 전체를 표현하거나 전체로 일부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거나 '그는 나에게 와서/꽃이 되었다', '사철 발 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는 곳'이라는 식의 표현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주술적 사고는 이러한 상상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새 이빨 다오'하며 뽑은 이빨을 지붕 위로 던지는 건, '새'(bird)와 '새'(new)를 연결지은 것입니다. 말의 유사성으로 전혀 다른 범주의 사물을 연결지은 것입니다. 기원의 의미를 담아서 말이죠. '저주 인형'의 사례는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하는 사고방식을 볼 수 있지요. 저주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체 일부(보통 머리카락)를 담고 있는 인형에게 해코지를 하면 해당 인물에 위해가 가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이런 인형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저주 인형까지는 안 쓰더라도 사진으로 그런 행위를 일삼는 경우도 있죠. 졸업앨범에서 싫어했던, 혹은 나를 괴롭혔던 친구의 사진을 훼손하는 일이나 직장 상사나 골칫거리 동료 사진을 다트 판에 붙여 놓고 다트로 맞춘다든지 하는 행동들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물건/표식도 집단 전체와 동일시되어서 그것을 훼손하는 것이 '범죄'나 '테러', '공격'으로 인식되지요. 국기를 태우는 행위를, 우리는 그런 의미의 상징적 행위로 간주하곤 합니다.


현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스포츠(?)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정부에 항거하는 의미로 태극기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진 바 있으며, 이는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모두 국기모독죄로 처벌되지는 않았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신성한 것과 그 반대로 더럽고 오염된 부정한 것을 구분짓는 사고방식이 작동합니다. 물론 행운과 불운, 깨끗함과 더러움은 다른 층위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적으로 옳고 좋은 것과 옳지 않고 해로운 것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아무래도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분하는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관련을 갖는 것 같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이 폭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접촉한 것, 비슷한 것은 모두 '거부'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출처가 불분명한, 근거가 없는 정보들이 마구 유통됩니다. 사람들의 '비이성적 판단과 행위'가 규탄되긴 하지만 그런 생각과 행동은 좀처럼 관리되지 않습니다. 특히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지 않을 때, 그런 일이 심각하게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MERS가 확산되었을 때 직접 그런 일을 겪었죠. 전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니 기침하는 사람마저 기피하는 일들이 사회 이곳저곳에서 벌어졌습니다.


바세린으로 메르스 바이러스 퇴치한다는 유언비어


유명한 부적은 아니고 웃자고 만든 부적으로 보임.


신비한 일이 벌어지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걷잡을 수 없이 쉽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이야기하거나 전달하는 데에는 다양한 의도가 개입됩니다. 단지 재밌어서 옮길 수도 있죠. 유익하다고 믿어서 일수도 있고, 뭐 이런 게 다있네 하면서 할 수도 있고, 위로용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죠.


#5_왜와 어떻게라는 질문과 종교(적 인간) 이해


'종교', '예외적 기독교', '예외적 불교', '예외적 이슬람교' 등등을 생각하게 되면 이런 측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 사람들에게, 국경이나 나이를 초월해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라져야 할 '미신' 정도로 취급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고, 먹물들은 계속 비판만 하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뭐, 그런 경향이 앞으로도 없어지진 않을 거라고 예상됩니다만, 그런 시각에서 '왜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을 믿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답정너'인 문제가 되죠. 인간계몽 or 종교계몽.



그 일반성에 주목해서 종교적 생각과 실천을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집니다. 왜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믿는지를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