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읽기를 마치고(2): 종교학자로서 '코스모스' 읽기 - 갈다, 책쓰기, 신화와 종교 그리고 과학

2019. 3. 2. 20:13글읽기

#‘코스모스’에 대한 나의 감상 : 갈다, 책쓰기, 신화와 종교 그리고 과학


1. 갈다



‘갈다’의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관심이 있었던 것은 대중을 상대로 한 책 읽기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 실례를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필요조건들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 프로그램이 갖는 한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요한 것들은 장소, 사람들(전문가와 지적 관심이 있는 청중), 전문지식, 전문지식을 담고 있는 책(대중서로 정리된), 그리고 명성(혹은 소문? 혹은 홍보)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해당 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구비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계라면, 사람들의 관심도와 수준차를 다 포용하기 힘들다는 점인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논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어려웠다. 대학 강좌나 학술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은 이런 관심을 충족시키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같은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수요자의 니즈에 맞춰서 다변화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갈다’ 정도의 규모로도 그것을 달성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프라도 문제겠지만, 그곳까지 가서 무언가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맘을 먹는 사람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런 측면에 대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 같다.


여기까지는 ‘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느낀 점이다.


추가> 종교학 책 읽기 프로그램은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여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 같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보면 시장성은 처참한 수준일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걸 상상해 볼 수 있었다는 것도 나름... 좋았다 해야할지, 슬펐다 해야할지, 고민스럽긴 하지만 일단 좋은 걸로 치고.


2. 책쓰기



‘코스모스’ 읽기는 ‘책쓰기’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를 생각하게 해줬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게 사실 거의 없다. 학교에서 하는 활동은 주로 관련 분야 연구자들에게 소통될 수 있게 하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가 감을 잡게 해주는 정도이다. 대중에게 관련 분야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코스모스’ 읽기는 내게 이 문제에 관한 하나의 좋은 샘플을 보는 기회였다. 그러나 아마 세이건의 능력을 흉내 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지력이나 필력, 어느 것으로도 그에게 조족지혈일 테니 말이다.


뱁새와 황새의 차이를 안다고 해도 칼 세이건의 글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그의 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다.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한다고 해서 그의 글이 쉬운 것은 아니다. 관련 분야 전공자들이 보기에 하자가 있는 부분이 있긴 하겠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교양독자라고 해서 그의 논의를 다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본 프로그램의 토론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토로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물음과 답변이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진행된다. 별과 우주의 진화 안에 생명의 진화가 담기는 것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써, 우주적 스케일에서 만물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로부터 다른 외계 생명체, 외계 문명의 가능성을 추정하고, 인간 존재론을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한다. 그래서 칼 세이건의 과학적 인간 존재론과 도덕론은 코스모스 대서사의 스케일이 그 현실성의 무게로 변환되는 듯하다. 공감각적 감각의 전환이 ‘코스모스’를 읽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 같다. 가히 마법적 전환(magical conversion)이다. 이런 부분에서 개인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텍스트에 담긴 메시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이 지적 존재로서 성장해 가면서 신화나 종교로부터 탈출해서 과학적 성취를 이룩하는 ‘사상적 자유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러한 해방의 지성사는 직관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해방은 언제나 가슴이 뛰며 피가 끓는 서사다. 몸의 자유와 정신의 자유, 어느 쪽에서나 ‘자유와 해방’은 이 시대의 지고선의 가치 중에 하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마법적 전환이 탈마법화(disenchantment) 서사에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칼 세이건은 지식을 그냥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다른 유명한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글쓰기 방식은 구체적 사례로부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점이다. 딱 떨어지는 무미건조한 사실들의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복잡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인간의 스토리텔링 능력의 진화가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런 정보 전달 방식이 대중서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책쓰기’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은 ‘반면교사’로 삼고 싶은 것이다. ‘빅 히스토리’ 쓰기의 전형을 보여준 책답게 책이 너무 두껍다는 점이다. 책이 술술 읽히는 측면이 있지만 절대적 양이 너무 많은 감이 있다. 그건 다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소화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다큐가 충분히 이를 보완할 수 있지만 다큐도 13부작에 이르러서는, 요즘 시대에 정말 소화되기 어려운 것 같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블로그 포스트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작자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3. 신화와 종교에 대한 '계몽적 접근'의 한계


아시아 경제, 카드뉴스, '"종교는 인민의 아편"… 과학으로 입증됐다' 중 한 컷


종교학자(각주: 이렇게 쓰는 건 낯 간지러운 거지만, ‘종교 연구자’라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 같다. 나는 결코 ‘종교’를 독립된 실체로서 대상화해서 연구하는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통해서 종교, 종교적인 것들을 탐구하거나 그 반대의 방향에서 종교, 종교적인 것들을 통해서 인간을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다소 과도한 ‘종교학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것도 어색하긴 하다.)로서 이 책의 기본적 서사 구조, ‘사상적 자유의 서사 구조’의 희생물인 신화나 종교에 대해서 칼 세이건이 ‘과학적 이해’를 보여준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건 분명 시대착오적 지적일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종교와 관련된 인간의 진화된 기질이 진화 과학적 논의 맥락에서 조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스모스’를 읽는 오늘의 독자 입장에서는 이 점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계몽의 서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점은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신화나 종교와 같은 것은 과학적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면 사라져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겠지만 집단 전체의 스케일에서 보면 신화와 종교의 자리는 언제나 남아있다. 그것이 무지의 산물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들만의 시각이 아니라 전형적인 지식인들의 시각이었다. 동서고금, 과학자와 비과학자를 막론하고 지식인 계급에서 이러한 계몽적 시각은 쉽게 확인이 된다.


고려 명종 때 이규보는 ‘노무편(老巫篇)’이라는 글의 서(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쪽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모이는데, 그 음란한 노래와 괴상한 말들이 귀에 들린다. … 나는 한갓 동쪽 이웃에 음란하고 요괴한 것들이 쓸어버린 듯 없어진 것을 기뻐할 뿐 아니라 또한 서울 안에 아주 이런 무리들이 없어짐으로써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들이 순진하여 장차 태고의 풍속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며, …. 또 밝혀 둘 것은 이 무리들도 만약 순진하고 질박했다면 어찌 왕경(王京)에서 쫒겨났겠는가. 결국 음란한 무당에게 의탁하기에 쫒겨나게 된 것이니 ….


출처: ‘노무편’, 동국이상국전집 제2권.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우매한 대중이 허무맹랑한 소리에 열광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종교적 상상력에 사람들이 솔깃해 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논의가 아직 국내에는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우매’해서 사실에서 먼 이야기에 열광하는 게 아니다. 그 나름의 ‘합리적 계산’이 있다. 이런 합리성, 겉으로 보기에는 비합리적이지만 해당 상황에서 인간이 제법 효율적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런 합리성이다. 이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행동 경제학에서, 최근의 인지과학과 인지심리학, 진화심리학, 그리고 신경과학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분야들에서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생각과 행동에 내재해 있는 합리성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은 ‘마음(과 감정)’으로 많은 것을 추론(계산)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모르는 인자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을 상상한 것은 그렇게라도 해당 인자에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의 언어로 비합리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저 ‘모르는 것’으로 남아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그 부정적 효과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 것이 개인에게든 한 집단에게든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


신화와 종교와 같은 것을 과학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전망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한 단순한 계몽주의적 접근은 문제적일 수 있다. 해당 계몽의 메시지조차도 하나의 단순한 주장이자 선언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종교적/신화적 상상력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그것의 비합리성을 확인하고 인간 세계에서 배제하는 데 초점을 둘 게 아니라, 그 나름의 합리성을 확인하고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설명하고,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음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의 시각은 그런 면에서 확실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