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와 공부(2017년 글)

2019. 7. 15. 03:54etc/삶에 관한 단상

2017년 2월 14일자 '한종연 뉴스레터'로 냈던 글이다.

'설거지와 공부(2)'를 쓰려고 보니 이곳에 없어서 다시 올려 둔다.


결혼 10년, 학위논문도 마쳤겠다, 이제 더 이상 가사노동 분담 열외의 핑계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간간이 생색을 내며 해 왔던 일이 오로지 나의 일이 되었다. 물론 이제까지 가사노동 분담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집 청소는 내가 담당한 중요한 가사노동이었다. 다만 청소는 제법 미룰 수 있는 일인지라 비교적 수월하게 회피하기도 하면서 근근이 해 온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내 일’이라는 거부감은 별로 없다. 반면 설거지는 회피술이 통하지 않는다. 당장 삼시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니 말이다.

책상물림이라는 게 좋게 말해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세상과 담쌓고 사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보통 세상살이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 일’ 중 어떤 일에 무관심한가는 각자 사람마다 개성이 드러난다. 내게는 그것이 가사노동이다. 한국사회에서 ‘공부’는 그런 면에서 제법 훌륭한 핑계를 제공해 주기도 해서, 나는 공부를 주특기로 하여 집안일 면제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살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본질로 치환하는 데까지 나갔다. 제 몸 하나 건사하는 데에 필수적인 소소한 일들, 예를 들어 요리, 청소, 정리정돈과 같은 집안일에 ‘소질 없음’이라는 딱지를 스스로에게 붙여 왔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책상물림답게 성평등 문제에 대해서 제법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임해 왔다. 누구에게 특별히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지난 해 초 ‘--하다 죽은 00’이라는 트위터 계정들이 이슈가 되었을 때, 최전선에서 키보드 워리어로 참전하여 ‘밥하다 죽은 엄마’ 계정(‘집안일 하다가 죽은 딸’도 비슷한 계열의 계정)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노력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선 ‘일하다 죽은 아빠’ 트윗 계정을 보고서는 ‘참 찌질한 남자들’이라는 생각 정도는 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찌질함에 일침을 가하는 ‘일 시킨 사장’ 계정이 나왔을 때도 ‘속 시원하게 정곡을 찔렀다’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삶의 현장, 가사노동 분담을 둘러싼 아내와의 숨 막히는 전투의 현장에서 나는 ‘찌질한’ 남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댈 수 있는 그럴 듯한 이유들은 모두 동원되었다. 직장인이 아니지만 ‘일하다 죽은 아빠’ 코스프레도 빼놓지 않고 구사했다. 숱한 과거사들이 환기되었고 서로의 약점을 찌르며 인신공격을 일삼기 일쑤였다. 분명 투쟁의 자아는 결코 이성적 자아는 아니었다. 아니 분명 이성의 숨결이 살아있었지만 ‘잠시 꺼 둔’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웠다. 

반성을 통해서 ‘무조건 항복’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 최대한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 가능했을 뿐이다. 아직도 ‘반격의 자아’는 꿈틀대고 있다. 쉽게 상대의 관점, 상대의 자리에 설 수는 없었다. 한 명이 피해자라면 다른 한 명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싸움의 승리자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피해자가, 패배자는 부도덕한 가해자일 뿐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도덕한 가해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비장한 결단을 내려서 ‘항복 선언’으로 이어진 것도 물론 아니다. 찌질한 저항을 일삼으면서도 상대의 요구에 반응하며 조금씩 스스로를 바꿔가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안정의 한 징후는 설거지라는, 반복적 행위이자 제한된 매뉴얼에 따르는 기계적 행위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공부의 주제, 글감을 생각하고,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다는 데에서 확인되는 것 같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족에게 청결한 식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결코 그리 될 리가 없다. 맡겨진 일이고, 해야 하기에 수행하는데, ‘의미’는 별로 환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빈자리에서 의식이 가다듬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치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의례 행위가 선정(禪定)과 같은 특별한 의식 상태를 창출하는 것처럼, 고요하고도 선명한 사유가 그 빈자리를 채워갔다.

설거지를 맡게 되면서 나는 앎의 체화에 깃든 폭력적 구조(이전의 자신을 깨야하는 일, 스스로 하지 못할 때는 공격 같은 비판을 받아야 함)를, 투쟁과 사랑의 끊임없는 진동 안에서 성평등 문제가 최종 해결 없는 해결책 찾기임을, 무의미한 휴지기가 학습 증진에 유용함을, 의례 행위의 무의미성과 의미 추론 행위의 관계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소하게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의 허구성을,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기보다는 ‘굳을 새 없이 비는 많이 내린다’는 현실을 깨닫기도 하였다. 아내는 육아와 집안 살림으로 미뤄왔던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 이러한 ‘한없는 체험’의 ‘끝없는 반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공부’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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