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읽기의 마법

2019. 11. 1. 21:00실종리폿/미신은 살아있다

성경을 통독하면 좋은 운을 얻을 수 있다? 건강을 찾을 수 있다? 재물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들은 과연 기적에 의한 것일까?

“성경 통독의 유익”

 

성경 통독의 유익

에바다 티비 김기준입니다. 오늘은 성경 통독이 왜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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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보면, “뜻하지 않던 여러 가지 질병이 찾아왔”는데, “주님이 완치해 주셨”다고 하면서 성경 통독의 유익을 이야기한다. “성경1독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 제 경험상 분명히 얽히고 설킨 문제들이 단칼에 풀어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성경 통독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와 있다. 한 책(‘내 인생을 바꾼 31일 성경통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성경통독, 참으로 힘들다. ...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을 경험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 성경통독을 통해 당신의 인생이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 바란다.”(출판사 서평에서)

경전 읽기만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람’만의 신앙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십이 사도 정원 회의 회장인 러셀 발라드(M. Russell Ballard)는 “The Miracle of the Holy Bible”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의 권능을 아주 깊이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의 본질은 누구든지 그것을 읽거나 그 내용이 논의되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즉시, 자신이 완벽한 사람으로 성장할 때까지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했다. (마이클 윌콕스의 『뼛속의 불: 순교자, 영어 성경의 아버지』, 2004, xv)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년, 윌리엄 틴데일은 영국의 종교인이다. 존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아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영어 번역을 위해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번역작업을 했으며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6년 10월6일 화형당했다(출처: 위키백과).

 

경전 읽기를 통해서 ‘신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거나 경전의 내용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건 즉각적으로 기대되는 결과는 아니다. 많은 성경 통독/완독에 대한 이야기에서 “눈으로만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보통의 통독/완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문자를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다.

그래서 수백독을 한 사례나 천독을 하는 행위에 대해 “1백독을 하더라도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알지 못한 채 읽는다면, 자기 발전을 위한 지침서나 자기를 과시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우상적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나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라는 지적을 볼 수 있다(“우리의 성경읽기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기독일보, 2018-02-21).

이런 진술에서 “자기를 과시하는 도구”, “우상적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주목된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성경 읽기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주목되는 것은 ‘행위’만 있지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수백독, 일천독을 하는 ‘반복된 행위’는 있지만 그것으로 신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 증진이 누락될 수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통독/완독을 내세우는 국내 어떤 교회에서도 읽는 횟수보다 성경 내용 파악에 더 의미를 두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게 ‘문제’일까? 아니 이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종교적 관념과 행동의 ‘자연스러운 모습’ 중의 하나다. 다만 이런 행위 양태를 민속신앙, 무속신앙으로부터 ‘오염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 하에서만 문제가 된다. 기독교적 내로남불은 늘 유일신과 관련된 행위 양식과 다른 신(혹은 정령)과 관련된 행위 양식을 구분 짓고 전자는 신의 기적으로 후자는 사악한 영이 개입하는 미신, 마술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신의 문자가 지닌 신령한 힘을 전해 받는다는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경건한, 그러면서도 반복적인 경전 읽기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삶에 기여를 한다. 신이 역사에 직접 개입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의례적 경전 읽기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변화가 일어나게 한다. 그 한 예가 아래와 같은 진술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story230.tistory.com/1000

읽기의 의례적 행동이 '행운'을 불러오는 것은 우리의 주술적 관념, 직관적으로 쉽게 작동하는 관념에 기인하면서 반복된 행위가 선사하는 '마음의 집중'을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들에 대한 대응 능력을 제고한다는 면에서 실제 어떤 '효과'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정신 승리의 몸짓'은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읽기의 의례적 측면은 '잡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명상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명상이 신체 및 정신 건강 증진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실마리는 다음 글 참고. "명상이 장수에도 도움이 될까", 동아사이언스, 2019.10.29)

종교는 미신적 관념/실천과 대비되는 게 아니다. 그 안에도 미신은 살아있다. 얼마나 그것을 교리/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지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상상력/관심을 벗어난 종교적 관념만으로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울 수는 없다.

 

사족: 경전 기반 종교와 구술적 종교 전승의 차이(?)

순수한 읽기 그 자체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신의 은혜(복, 건강 등)를 줄 수 있다는 관념은 소위 ‘미신적 사고방식’ 혹은 ‘주술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 힘의 원천은 ‘신’이라는 존재이다. 그의 의지에 의해서 힘이 행사된다고 여겨진다. 유일신적 체계에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신이 거처하는 곳, 신에게 예배하는 곳, 신이 전한 메시지 등등.

신과 접촉되었고 근접한 것이 더욱 신성하다는 관념은 ‘접촉주술’적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소수의 사제들만 볼 수 있었던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서 신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경 그 자체의 신성성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가치가 반감되었다.

신의 메시지가 담긴 책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성물의 신비한 힘(신의 은총)을 쉽게 활용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특별하게 하는 ‘장애물’, 신의 메시지를 소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난관이 주목된다. ‘성경 전체를 다 읽는 것’, 다 읽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이 읽는 것’, 더 많이 읽을 때의 기준은 더 큰, 그리고 십진법 체계에서 의미 있는 숫자나 1년 시간 체계와 연동된 숫자들이다. 1년 통독, 1개월 통독, 하루 통독이나 10독, 30독, 100독, 300독, 500독, 1000독 등이 주목된다.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들이 신의 메시지를 특별하게 ‘해석’하는 이야기를 별로 들어 볼 수 없다. 그들이 독창적인 신학적 해석체계,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로지 남은 것은 ‘몇 번이나 읽었느냐’다. 그리고 붙는 서사는 ‘내 삶이 달라졌어요’류의 간증서사다.

주문 외우기와 경전 읽기의 거리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 이유다.

주문 외우기와 경전 읽기의 유사점에는 ‘읽고, 말하기 만으로 삶에 원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관념만 있는 게 아니다. 주문은 통상 일상어가 아니므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경전 읽기로 사용되는 경전도 통상 일상적 표현이 아니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읽기 쉬운 현대어 번역본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옛날 번역본이 더 나은 성경이라는 인식도 팽배하다).

의미가 아니라 읽고 발화하는 ‘행위’가 더 중요한 문자의 사용이다.

반면에 의미가 더 주목된다면, 해석의 권위자에게 종속된 ‘스터디’가 이루어지게 된다. 사제와 신도 사이의 권력 구도가 그러한 학습을 통해서 확장될 기회를 갖는 것이다. 텍스트 기반 종교 활동에서 ‘신의 메시지 해석의 권위’를 사제가 가져가는 것은 좀 다른 모습처럼 여겨진다. 미신적 신행과 구분해서 말이다.

가령 신의 메시지를 텍스트로 가지고 있지 않는 종교 전승에서 사제의 권위는 ‘메신저’로서 확보된다. 무당의 ‘공수’와 같이. 다만 그 경우에도 신의 메시지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는 ‘해석’이 신의 메시지 전달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을 가진 종교나 그렇지 않은 신앙체계나 사제의 권위 생성의 기본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식과 전략이 문자 기반 종교에서 더 체계화 된다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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