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발상의 전환│프랑스 교사 참수 테러, 표현의 자유, 그리고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2020. 10. 24. 10:53연구노트/종교와 종교학

프랑스 교사 참수 사건에 대한 BBC의 최근 기사

프랑스 현지 시간 2020년 10월 16일 금요일에 중학교 교사 한 명이 길거리에서 참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잘 알려진 바대로 피해 교사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수업을 진행(10월 5일)하면서 2015년 1월 15일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촉발시킨 무함마드에 대한 만평을 소재로 사용했다.

이 일로 일부 무슬림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을 불러왔고, 한 학부모에 의해서 그의 '해당 수업의 만행(?)'과 '신상정보'가 SNS 상에 올려졌다.

이를 본 러시아 출신 난민이자 무슬림이었던 압둘라 안조로프(18)가 피해자를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범인은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이러한 테러를 촉발시킨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몇몇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체포된 상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시선은 무엇일까? 뭐, 다른 게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이슬람 포비아'

몇몇 댓글 반응으로도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7일 나온 '다음'에 실린 연합뉴스 기사의 베댓('찬반순', 공감↑ 반대↓)을 보면,

<다음>에 배포된 "무함마드 만화 보여준 프랑스교사 길거리서 참수..마크롱 "테러""(연합뉴스) 기사의 댓글

이슬람 난민에 대한 거부감, 이슬람 종교에 대한 부정, 한국 이슬람 인구 증가에 대한 걱정 등의 댓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문제의 출발점,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2015년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나무위키).

주목할 것은 '표현의 자유' 문제가 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다.

서울신문의 한 기사(또 ‘이슬람 = 테러’ 암시 만평 ‘위험한 펜’ 佛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사진을 보자.

서울신문의 위 기사에 실린 이슬람에 관한 샤를리 에브도 만평 이미지

한국인들에게 '이슬람'이 좋게 보이지 않아, '저게 왜 문제야' 싶을 수 있겠다.

다른 것도 좀 보자. 2015년 터키 해안가에서 시리아 난민 꼬마 '아일란 쿠르디'가 시신으로 발견된 일이 있었다.

2015년 9월과 2016년 1월 샤를리 에브도는 아일란 쿠르디를 자신들의 만평에 등장시켰는데, 이 만평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2015년 9월 샤를리 에브도의 아일란 쿠르디 만평 
2016년 1월 샤를리 에브도 만평

과연 이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의문이 '테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hate speech)의 경계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 이 문제가 민감하게 다뤄졌다. 몇몇 언론과 일부 인사들에게서 말이다.

표현의 자유(서울신문, 2015-01-09)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한겨레 사설, 2015-01-12)

교황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 있어"(연합뉴스, 2020-01-16)

외신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뉴욕타임즈의 Charlie Hebdo’s Defiant Muhammad Cover Fuels Debate on Free Speech(2015-01-13)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정답'은 다음과 같다.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혐오표현(hate speech)을 폭력으로 억눌러서는 안 된다.

 

무슬림 포비아 이상을 느껴야

이런 사건은 특정 종교, 인종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다. 언론도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뉴스 장사를 한다. 최근의 사건(프랑스 교사 테러)에 대한 언론 보도와 사람들의 반응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풍자의 이름으로 모든 게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한다면 말이다. '다문화 사회'라는 게 그냥 이 민족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도덕적 타자인식의 선전 구호 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미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뒤섞여 지낼 수밖에 없는 '글로벌한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최근 프랑스 교사 살해 사건에 대한 보도로 인해 난민,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이 증폭되는 걸 본다. 이건 해당 사건을 다루는 서구 언론의 기사, 그것을 받아 쓰는 한국 언론의 기사를 본 우리의 1차적인 반응이다. 폭력적 행위에 대한 거부감, 그 범죄 세력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해당 보도들의 프레임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틀로 수호된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 수준을 볼 때, 해당 프레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최근에 서구 언론의 프레이밍에서 벗어나서 미국의 흑인 문제를 바라봤다.

Black Lives Matter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국인들은 거의 '본증적인' 불편을 느꼈다. 미국 흑인들의 아시아인(특히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Asian Lives Matter 이야기가 조금 나오기도 했다. 두드러지게 감지된 기류는 흑인들의 '폭력적 대응'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했다.

이런 대응의 경험이 정당한가를 별문제로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게 있다. '문화/종교 갈등 사건'이 단순히 '제노포비아', '이슬람포비아'의 재료*, '특정 종교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소재 이상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선택적이다. 미국 등 서양인과 기타 외국인은 구분된다. 주변부 타자(우리보다 못하다 생각되는 타자)에 대한 혐오라고 보는 게 적확할 것 같다.

 

더 생각해 볼 문제 

왜 무슬림들이 유럽 사회에서 늘어나는가...서방의 식민 지배/자원 수급 정책과 이슬람 세계의 피해.

우리와 이슬람 세계의 관계 설정 문제...서구의 상황과는 다르다. 이슬람권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고민 필요.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와 적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 왜 우리와 척을 진적도 없는 사람들과 적대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세속/종교의 구분이 갖는 한계...종교의 정치개입, 헌법적으로 부정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작동함.

세속 사회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어느 사회나 이런 건 존재한다는 점. 그래서 비판과 풍자가 특정 집단이 신성시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일 때,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필요.


서로 왕래가 자유롭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타자 혐오'(중국 화이론의 타자관, 조선의 소중화론의 타자관, 문명/야만 구분의 타자관 등)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충돌'은 대체로 변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글로벌화 된 요즘 세상에서 '타자 혐오'(이민족, 타종교인, 타성별, 타성정체성, 타사회신분계급 등)는 '사회 안의 갈등'을 유발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상호 호혜주의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정한 타자에게 우리가 충분히 부정당할 수 있다. 이건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게 아니라 '정당한 폭력'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 결과가 폭력의 충돌일 것은 자명하다.